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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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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ta contemplativa

내 삶이다

하나 뿐인 마음 2013. 12. 7. 15:43


미사 도중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필리피노로 보이는 남자분이 자꾸만 뭐라고 중얼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런데 의아해하는 사람은 많아도 아무도 아는척을 하지 않는 것. 미사는 진행되고 있는데 주위가 산만해지니 안되겠다 싶어 일단 내가 밖으로 나가서 무슨 일이냐 물어보았는데, 더블파킹이 되어 있어 차 주인을 찾는다는 게 아닌가. 아는 영어를 총동원해서 지금은 미사 중이라 공지를 할 수 없다고 하니, 너무나 곤란해하는 것이…. 미안하지만 당장 가야하느냐 물으니 급하다고 이야기를 하는데(사정은 못알아들음ㅠㅠ) 나로선 도저히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분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고 가보니 어찌어찌 하다보면 차를 겨우 뺄 수 있을 것도 같아, 내가 지켜봐줄테니 한번 더 시도해보라고 애기했다. 그는 오케이~하더니 얼른 시동을 걸고 이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왔다갔다를 반복, 나역시 그동안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차가 부딪히지 않게 '괜찮다', '이제 그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여차저차 무사히 그는 차를 뺄 수 있었고 너무나 고마워하며 나를 위해 기도해주겠다는 약속까지 어둔 밤길에 낯선 남자의 출발을 지켜봐주다가 문득 이건 내 삶이다 싶더라. 타인의 삶을 직접 움직일 수는 없지만, 그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나도 따라 움직이며 지켜봐 주는 것. 괜찮으니 마음 놓고 가라고도 말해주고, 더이상은 위험하니 이제 방향을 바꾸라고도 말해주고 그가 가는 길을 함께 따라 나서지 않지만 그가 가는 길에 축복있기를 빌어주는 삶. 그리고 그의 기도로 힘을 얻는 삶. 그래 이게 내 삶이구나. 


하늘을 올려다보니 밤이 어두운만큼 달은 선명했다. 요즘 내 삶이 좀 캄캄한가 싶더니 이렇게 또렷한 달을 선물로 주시는구나. "주님, 곧 이렇게 당신도 또렷하게 환한 빛으로 오시겠지요, 깊은 밤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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