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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다

아무르

하나 뿐인 마음 2013. 2. 8. 11:58



아무르 (2012)

Love 
8
감독
미카엘 하네케
출연
장 루이 트렝티냥, 엠마누엘 리바, 이자벨 위페르, 알렉상드르 타로, 윌리엄 쉬멜
정보
드라마 |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 127 분 | 2012-12-19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기념으로 수녀원 문화교실.

이동진 기자의 말대로 이 영화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죽음의 예감'에 대한 영화이며,

"인간은 죽는다"라는 명제가 아니라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라는 언명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 마음에 또렷이 남아있는 단어는

'아무르'가 아니라 '죄책감'이었다.

죄책감이라......

사전은 "저지른 잘못이나 죄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거나 자책하는 마음 "을 죄책감이라고 정의한다.

잘못도 죄도 없는 조르주가 마지막을 향해 가는 아내 안느에 대해 갖는 죄책감은 무엇이었을까.

지난 1년 간 강정마을에서 쌍용자동차 농성장에서, 시국미사에서, 수많은 해고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가끔은 내 바로 옆 사람들을 대하면서 무시로 가졌던 나의 '죄책감'은 또 무엇이었을까.

죄책감을 지니지 말라던 안느와 죄책감 없다는 조르주.

 

평생을 함께 하자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데에 대한 죄책감일까

대신 아파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일까.

100% 순결하지 못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음에 대한,

노쇠이든 성격이든 그게 무엇이든 인간적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음에 대한,

죄책감일까...

 

조르주는 딸을 앞에 두고 말했다.

엄마와 나는 산전수전을 함께 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처음이지...

조르주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지만,

그 최선이 누구를 위한 선택이었을까.

그 '누구'가 하나가 아닌 '둘'임을 인정하는 순간이 어쩌면 '아무르'의 시작이자 완성일지도 모르겠다.

 

안느는 끝까지 우아하고 싶었던 당당하고 싶었던 자신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한계가 왔음을 깨달아 간다. 

저항도 컸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 그 자체였기에 인정하기가 차라리 낫다.

반면 조르주는 꿈을 통해 자신을 보게 된다.

시종일관 걸어잠그던 문을 열게 하는 초인종 소리를 듣게 되고

침울한 복도를 걸어 내려갈 출구가 막힌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

컴컴한 복도 끝에서 이미 물이 발목까지 차올랐음을 깨달으며

마침내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이 뒤에서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꿈...

그리고 무의식 속의 두려움을 감지하게 된 조르주는 여전히 최선을 다하지만

어느 때부터 그 방향은 조금 바뀌게 된다.

 

비둘기가 나온다. 두번이라고도 하는데, 액자 속 그림을 합치면 세 번이다.

누구는 그 비둘기를 아내라고도 하고 누구는 그 비둘기를 삶이락도 하고...

나에게 그 비둘기는 죄책감이었다.

액자 속에 있다가... 창을 통해 그들 삶의 유일한 공간으로 들어와 누비는 비둘기.

조르주는 그 비둘기를 창을 통해 다시 내보낸다.

창문을 닫기 전 가만히 두어도 무방한 창틀에서 다시 앉은 비둘기를 쫓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여전히 액자 속에 존재하지만, 다시 집안으로 들어온 비둘기.

오히려 창도 문도 닫아버리고 비둘기를 잡는다.

몇번의 실패 끝에 이불로 비둘기를 덮어서 잡은 다음

조르주는 의자에 겨우 걸터앉아 꼭 싸맨 비둘기를 품에 안고 안도한다.

유서 처럼 남긴 편지에는 쉽게 비둘기를 잡았다 하고,

자유롭게 해 주었다고 말하지만 단번에 비둘기를 잡지도 못했거니와

날려보내는 장면은 나오지도 않는다.

 

액자 속에 고이 모셔 두었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죄책감이

언젠가부터 내 의지와 관계 없이 내 안에 마구 치밀고 들어와

나를 한없이 작게 만들더니,

(물론 조르주처럼 그걸 쫓아내던 시간도 있었다...)

내 손으로 그걸 잡아서 내 품에 안고 오히려 평화를 누릴 줄도 알게 되었다.

 

올해 나는 하루키의 문장으로 신년을 밝히고자 한다.

"만일 높고 단단한 벽과 그에 부딪히는 달걀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언제나 달걀의 편에 설 것이다."

죄책감도 사랑의 일부임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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