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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RB 제5장 순명에 대하여 본문

"겸손의 첫째 단계는 지체 없는 순명이다."(RB 5,1) 규칙서 5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살다보니 쉬운 일은 정말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수도생활에서 '살수록 어려운 일들' 중에서 순명 만한 게 또 있을까 싶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예전엔 시키는 대로 혹은 하자는 대로 하는 일이 조금도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부모님의 말씀 대부분이 그랬고, 아기 때부터 성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나로서는 알고 지내는 친구, 선후배, 어른들 대부분이 성당 사람들이었고 심지어 교리교사로 만나는 아이들 외에 과외 학생의 반도 성당 아이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의견이 좀 다를 순 있어도 잘못된 일을 시키는 경우는 없었다. 힘들어도 해야하는 일이었고, 서운하거나 속상해도 옳은 일들이었다. 하기 싫을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겠다 고집 부릴 만한 일들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선택 피정에 들어가서 잘 하는 것 하나를 말해보라는 시간에(사실 그때 나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잘 하는 것은 '00'였는데, 피정까지 들어갔으니 좀 벗어나고 싶어 다른 걸 말한다는 것이...) '순명'이라고 말했고, 20년 넘도록 이 기억은 나를 수시로 부끄럽게 만든다. 간도 크지...
처음엔, '이것(순명)은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소중히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알맞는 일'이라는 문장에서 한동안 넘어가질 못했다. 물론 그러려고 살고 있는 삶이지만, 나 진정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없는가... "제가 한없이 부족하오나 원의만은 한 올 거짓 없는 진심입니다."는 애원 기도가 절로 나왔다. 겨우 넘어가서 5장 전체를 되풀이하여 읽다보니 이번엔 마음에 자꾸 걸리는 표현들이 있었다. 지체 없는 순명(1절), 즉시 하느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여(4절), 실행함에 지체할 줄 모른다(4절), 듣자마자(5절), 즉시 그만두고(7절), 즉시 손을 떼어(8절), 순명의 빠른 걸음으로(8절), 한순간에 이루어지듯이(9절), 하느님을 두려워함에서 오는 신속함으로(9절), 함께 빨리 실행된다(9절). 재바르기보다는 느긋한 성격인 나로서는 부담스러운 표현들이었지만, 바른 판단을 위해 심사숙고하여 분별하는 일이 불필요해서가 아니라 숙고와 판단의 단계를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바로 실행에 옮기라는 뜻이 아닌가 싶었다. 생략된 듯한 그 단계들은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혹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람이) 이미 하셨다고 믿는 것이다. 나는 이 신속함 앞에 참 많이도 부끄럽다. 내뜻대로 판단한 것도 모자라 일부러 미루기도 했고 잊어서 미뤄지기도 했다. 간혹 겉으로는 지체 없이 따르는 듯 보였어도, 판단과 불평은 오히려 빛의 속도보다 빨랐던 적도 있지 않은가. 숙고와 판단을 하느님께 드리지 못했고 여전히 내뜻을 첫자리에 두고 산다.
베네딕도 성인에게 있어서 순명은, 명령 자체가 무엇이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명령 자체를 하느님의 명령(4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기에 순명은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라기보다 내 뜻을 접는 행위였다. 순명은 이렇게 하느님께 하는 것이니 나의 순명을 하느님께 맞갖는 '진짜'로 만들어야 한다. 성인은 "명령받은 바를 겁내지 않고 느리지 않으며, 무관심하지 않고, 불평이나 싫다는 대꾸 없이 실행할 때"(14절) "순명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고 사람들에게 감미롭게"(14절) 된다고 했다. 겁내지 않기에 주저하지 않으며, 느리지 않도록 내 몸과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며, 염두에 두고 책임을 다하며, 불평 불만이 감히 끼어들지 못하도록 좋은 마음으로 하는 순명.
2년 전 30일 피정에 들어오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었다. 일자리 수녀님들과 상의도 마쳤고 소임 조절도 했고 겨울 피정을 들어오기 위해 예비자 교리를 연달아 했고, 본당 제단체 교육이나 피정, 첫영성체 교리 등등을 1학기에 모두 몰아서 했다. 내가 맡은 일자리들이 순조롭게 돌아가도록 미리 연습을 시켰고 6개월간 병원까지 다녀가며 건강 상태도 체크했는데 갑자기 이동 명령을 받았었다. 이동 순서도 아니었고 일주일도 남겨놓지 않은 상태에서 통보를 받았으니 갑작스런 이동보다 피정을 못가는 게 나에겐 너무 큰 실망이었다. 겉으로는 순조롭게 이동해서 새 소임을 시작했지만 아주 오랫동안 마음 속에서 불평 덩어리가 이리저리 굴러다녔었다. 1년 후 다시 한 번 청했지만 2명이 일하는 본당이고 보좌신부님도 없는데다 책임이 무거운 신앙학교 등등의 이유로 불가능했었다. 지금은 오히려 함께 일하는 수녀님이 몸이 조금 불편한 상태라 더 불가능한 조건인데... 코로나 19 때문에 미사 외의 모든 행사가 중지되는 바람에 이렇게 들어올 수 있었고 순명하지 못했던 불편한 마음이 서서히 녹고 있다. 오히려 이 피정이, 지금의 나에게 얼마나 더 필요하고 중요한 시간인지. 내 뜻과 내 판단으로 순명하기 어려웠던 그때, 숙고와 판단을 하느님께 드리지 못했었다. 지나가 보아야 아는 일들, 뒤돌아 봐야만 볼 수 있는 은총의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지금 내 소임과 내 공동체 마저도 하느님의 판단이었음을 이 피정을 통해 조금 깨닫는 중이다.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13절) 이 말씀은 성경에도 나오지만 사부님의 이 표현을 처음 들은 때는 입회한 첫날 저녁이었다. 입회식을 마친 후 가족과 친구들, 지인들이 모두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처음으로 낯선 봉쇄구역을 통과해서 지원자 모임방에 모여 앉았을 때. 지원장 수녀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첫 만남을 시작하셨다. 나를 이곳으로 보내신 분의 뜻...을 지난 20년 간 나는 얼마나 이루며 살았나. 오늘도, 내일도 그분의 뜻을 이루며 또 하루를 살아가는 것으로 그간 못다한 내 순명을 늦게나마 갚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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