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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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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하나 뿐인 마음 2013. 12. 7. 07:44


김연수 산문집. 마음의 숲.

 

과연 이기지 않는 것은 패배를 뜻하는 것일까?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내가 왜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지 나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분명 좋아하는 작가 몇 명을 가지고 있고, 어쨌건 무조건에 가깝게 그들의 글을 선호, 편애한다. 내가 편애하는 작가 중 하나가 김연수이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왜 김연수를 좋아하냐고 물어온다면 그 순간을 위해 준비한 대답이 있긴 하다.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이 책에서 그를 좋아하는 이유를 찾아봐 달라고 말한다면 나는 다음 문장을 소리내어 들려줄 것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관성 없는 사람!

는 매 순간 변하는 날씨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살고 싶다. 그래서 날마다 그날의 날씨를 최대한 즐기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책은 '달리기'라는 행위를 곱씹으면서 작가의 삶을 풀어놓는 책이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 그리고 살고 싶은 인생을 달리기에 빗대에 말한다. 사람의 인생이 담기지 않은 대상이 있을까.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다. 세상의 기쁨과 고통에 민감할 때, 우리는 가장 건강하다. 때로 즐거운 마음으로 조간신물을 펼쳤다가도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물론 마음이 약해졌을 때다. 하지만 그 약한 마음을 통해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된다. 마찬가지로 가장 건강한 몸은 금방 지치는 몸이다. 자신은 지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약한 것들은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리고, 쉽게 상처받고, 금방 지치는 사람이다. 다행히도 원래 우리는 모두 그렇게 태어났다.

 

나는 이 작가가 강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좋다. 자신을 약한 사람이라 말할 줄 알아서 좋다. 작을 것을 큰 것에 비교하여 말하지 않아서 좋다. 성실하되 가열차지 않아서 마음이 편하다고나 할까.

외로운 밤들을 여러 번 보낸 뒤에야 나는 어떤 사람의 속마을을 안다는 건 무척이나 어렵다는 걸 알게 됐다. 하물며 누군가의 인생이 정의로운지 비겁한지, 성공인지 실패인지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했다.

 

 말하자면 나는 비가 내릴 때마다 젖는 사람이었고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지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젖지 않는 방법은, 쓰러지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믿는 것들을 위해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나 자신이 너무나 투명해지는 일이었다. 물방울처럼, 유리처럼 투명해지는 일이었다. 스스로 속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봐 겁내지 않는 상태. 아닌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말하는 상태.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건 대단히 가슴이 떨린다. 왜냐하면 거기까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이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했는데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한다면 정말 안 되는 일이니까. 그제야 나는 용기란 한없이 떨리는 몸에서 나오는 힘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게 바로 세상의 모든 영웅들이 한 일이다.

 

나는 기를 쓰고 열심히 살아내려 하지 않는다는 건 삶에 대한 의지 문제가 아니라, 집착 유무의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나의 삶이든 타인의 삶이든, 가치를 알고 존중하되 '나'의 한계로 한정짓지 않고 싶다. 그래서 솔직하고 싶고 언제나 가볍고 싶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긴 하지만.

때로 내게는 전혀 달리고 싶지 않은 순간이 찾아온다. 핑계를 대라면 수많은 핑계를 댈 수 있다.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에, 감기에 걸렸기 때문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하지만 나는 설사 그런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런 핑계를 떠올리지 않는다. 다만 달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 몸이 달리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건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살아있기 때문에 나는 가끔씩 그렇게 흔들린다. 흔들리면 나는 그 흔들림을 온전하게 받아들인다. 거기까지도 나는 달리기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없이 미워해 보지도 않고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것도 한결같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런 경우는 필경 둘 중의 하나다. 사랑하지 않거나 죽었거나. 

 

안타깝게도 그가 그토록 칭찬해 마지 않은 '달리기'에 매료되진 못했다. 하지만 그의 충고대로 온 몸으로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솔직하게 온몸을 경험하고자 마음 먹었다. 다시 한 번 , 아니 매순간 온몸으로 수없이 부딪히고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자 마음 먹었다.

인류는 상상력을 통해서 세계를 바꿔 왔다고 하지만, 세계 자체가 변한 것은 없다. 원래 지구가 태양을 돌았으며 석유는 땅 속에 묻혀 있었으며 신대륙은 대서양 저편에 있었다. 변한 것은 세계를 감지하는 우리 몸의 체계다. 그러므로 다들 먼저 온몸으로 경험하기를. 온몸으로 수없이 부딪히고 실패하고 좌절하기를. 더 이상 갈 수 없는 데까지 가 보기를.

 

참, 김천에 살던 작가는 책을 구입하러 대구로 심심찮게 올라왔고 하루종일 제일서적에 머물기도 했었단다. 나 역시 중학생 때부터 수도 없이 제일서적을 드나들었으니 어쩌면 우린 시집 코너 어딘가에서 옷깃을 스쳤을 수도 있겠다 싶더라마는. 기분 좋은 추억의 어딘가가 겹친다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지지 않는다는 말

저자
김연수 지음
출판사
마음의숲 | 2012-07-16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김연수, ‘애써 이기려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말하다 지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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