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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食性 人間

성서-소피아의 힘

하나 뿐인 마음 2025. 11. 2. 19:13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 지음. 김호경 옮김. 다산글방

성서와 교회 전통이 남성 중심적이며 성차별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일은 결코 쉽지(어렵다기 보다는 위험하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 않다. 그런데도 저자는 언제나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며 교회에 대한 사랑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서 이 연구를 계속했기에 우리에겐 너무 고맙고 소중한 책인데, 번역 자체도 개신교 역자이고 절판이라… 이래저래 속상하다(그래도 고맙지). 사실 잘 모르는 나에게도 성경은 남성 시각으로 쓰인 남성 위주의 글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살면 살수록, 내 경험이 깊어지고 신중해질수록 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발견하는 너무 큰 하느님 사랑이,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그 신비를 내 온 몸과 마음이 알아듣는구나 싶은 순간이, 내 지난 삶 굴곡진 곳마다 굽이굽이 감돌았던 그분 손길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되살아나 나를 가득 감싸고 오래도록 붙든다. 그래서 확신하게 된다, 내가(혹은 우리가) 아직도 알아듣지 못한 활자 너머의 하느님을 나는 얼핏하게나마 보았고, 쫓고 쫓아 결국 만나리라는 믿음으로. 인간의 언어를 빌려 인간의 관념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은 하느님의 지극히 작은 일부일 뿐(그러나 이 일부는 얼마나 큰가), 그러니 나는 인간의 약점을 제치고 걷어내어 성경 안에서 나의, 우리 모두(남녀를 뛰어넘는 모두)의 하느님을 또다시 만나고 싶다.

여성주의 관점으로의 성서비평에 관한 방법론으로 들어가려면 좀 오래 걸려야 하지만, 기회가 닿는 분들은 읽어보셔도 좋겠다. 발췌문들만 읽어도 좋긴 하지만서도…


p.0
"bell hooks Feminist Theory: From Margin to Center (Boston: South End Press, 1984) 91)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모든 비판적 판단이 중지될 때, 여성 대 여성의 부정적, 공격적인 행동이 나타난다." 여성들이 우리가 "다르다는 것, 우리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자신의 삶을 위해 싸울 감정 없이,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고, 논쟁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만, 그러한 행동을 멈출 수 있다. Jane Rule과 더불어, 혹스는 주장한다: 여성들의 자존심이 건전할 때만, 여성들이 서 로를 "쓰레기 취급" 하지 않고,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내 삶이 나의 것인 한 누구도 나의 삶을 불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갖고 있는 무서운 적대감의 잘못된 짐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지 않아야 한다."(hooks, 63)"

p.16
"“여성해방 운동은 여자도 인간이라는 기본적인 입장을 주장하는 것이다.” 널리 보급된 이러한 표리부동한 정의는 20세기의 여성해방 운동이 급진적이며 동시에 "상식적인" 개념이라는 아이러니를 강조한다. 이 정의는 또한 “우리, 인간”이라고 말하는 민주주의적 단언을 의미있게 하며, 여성해방 운동을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의 권리와 행복을 주장하는 근본적인 민주주의적 담론으로 만든다. 이로써 그것은 평등한 시민권과 종교와 사회에서의 결정권을 위한 투쟁의 기억들을 일깨운다."

p.16
"나는, 여성해방 운동의 다양한 이론들의 명확성은 엘리트 남성의 우월성을 비판하고, 성을 생래적이거나 하나님(G*d)에 의해서 운명지워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p.17
"그러므로 여성해방운동을 이론적 관점과, 사회문화적이며 종교적인 제도들과 지배와 착취의 구조들을 변화시키려는 역사적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 여성해방운동은 교회와 사회에서 여성의 완벽한 시민권을 회복하고, 성서, 전통, 신학, 공동체 등에 대한 연구를 여성해방적 용어로 개혁함으로써 이러한 일들을 이루고자 한다."

p.18
"여성운동은 표현의 자유를 위한 운동, 시민권 운동, 제3세계 해방운동, 반전운동 등과 같은 맥락에 있었다. 여성운동이 그것들과 연관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여성이 차별받고 억압당했다는 의식이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p.19
"사교와 정서적인 것을 여성의 특징으로 생각하는 반면, 학문적 행위를 남성들의 일로 간주했다. 여성은 그들의 몸 속에서 사는 반면, 추측컨대 남성은 그들의 머리 속에 살았다. 봉사는 여성에게 더욱 적합한 반면, 신학은 남성적인 일이었다."

p.26 ~ p.27
"베시 메리데스는 유닛 이야기를 여성에게 긍정적인 것으로 가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유딧에게는 아름다움과 책략이 공존한다. 여성들이 남성을 속이고, 해치고, 죽이기 위해서 그들의 매력을 사용하는 이 이야기는 여성의 아름다움과 섹슈얼리티가 남성에게 위험하다는 명백한 메시지를 불가피하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p.51
"현재와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여성해방운동과 여성해방적 사고는 토착민 보호운동과 생태운동, 노동운동, 평화운동, 동성애운동뿐 아니라, 완전한 민주주의적 시민권, 종교적 자유, 노예제 폐지, 인권, 국가적이고 문화적인 독립을 위한 해방 투쟁에 여성이 참여함으로써 발생했다."

p.53
"종교를 전적으로 억압적인 것이라고 거부하고, 종교가 여성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는 권능과 희망의 긍정적 원천임을 무시하는 것은 보수주의자, 즉 보수적 근본주의의 기득권 주장을 위해서 종교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p.53
"여성의 종교적 헌신을 "잘못된 의식"으로 무시하는 사람들은 여성해방론자들이 성서 종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간과한다. 그리고 그들은 불가지론적이거나 무신론적 페미니즘을 종교적 여성해방적 투쟁보다 더 우위에 놓는다. 그들은 종교가 소외시키고 억압적일 뿐 아니라, 자아 확신적이고 해방적인 의미의 틀을 수백만 여성들에게 여전히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p.80 ~ p.81
"지배 관계 때문에 여성들을 대치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여성신학과 종교에 대한 여성해방적 연구는 여성 억압의 다양한 구조에 대한 특별한 분석과, 생존하고 이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모든 여성들의 투쟁을 관심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여성신학과 종교에 대한 여성해방적 연구는 남성 중심적 텍스트, 전통, 제도, 권위 등에 대한 관심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여성들 자신들 문제에 대해 질문하고, 생존과 해방을 위한 여성 투쟁의 빛에서 자신들의 지적인 틀을 형성해야 한다. 수세기에 걸쳐서 가부장적 신학과 교회가 여성에 대해 침묵해 왔고, 권위 있는 종교 제도에서 여성을 배제시켰기 때문에, 여성신학은 여성이 종교적 주체가 될 수 있고, 성서적 신학적 의미에 대한 비평적 구성에 참여할 수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들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도록 권위를 부여해야 한다. 종교를 연구하는 여성해방 학자들이 이러한 지적 의식화의 과정과 기본적인 민주적 해방을 위한 지식의 창출에 성공할 때에, 그들은 규범에 의해서 훈육되기보다 규범을 바꾸는 방식으로 종교적 학문을 다시 쓸 수 있다."

p.87
"오늘날 미국의 정치, 과학, 경제, 교회의 영역에서, 여성의 자아 정의, 여성의 자아 결정, 여성의 평등, 동성애, 이민자들에 반대하고, 서구 세계의 "성서적 가치"를 조장하도록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수많은 설교단과 근본주의적인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서 주인지배적인 성서 텍스트, 즉 지배를 정당화하는 텍스트를 직접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한다. 해방 투쟁들과 여성해방론자들, 노동자들, 노숙자들, 불법체류자들의 해방 지향성을 종종 "하나님 없는 인본주의"나 서구 세속주의로 선언하며, 이것들을 모두 국가와 가정의 기본적인 기독교적 가치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p.88
"기독교 여성해방적 해석이 맞서야 하는 문제는 근본적인 신학적 문제다: 여성이라는 것과 기독교인이라는 것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는가? 이것은 이 두 정체성 중 하나가 다른 것을 위해서 자신을 포기할 때만 극복될 수 있는 근본적인 모순인가? 또는 두 가지 정체성-기독교인이라는 것과 여성해방론자라는 것이 득이 되는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그래서 기독교인이라는 나의 존재가 나의 해방 투쟁을 지지하고, 반대로 여성해방론자라는 나의 존재가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기독교인으로서의 나의 참여를 지지하는 것이 가능한가? 기독교 여성해방적 성서해석은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이 질문에 대응하려 하였다."

p.98 ~ p.99
"1678년 여성참정권협의회의 연례 모임에서,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요구했던 결의문을 소개한 사람은 마틸다 조슬린 게이지였다. 그녀는 이것이 개신교 종교개혁의 근본적 원칙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이제 여성들이 성서해석에 적용할 수 있는 개인적 양심과 판단력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 남성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성서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여성에게 오직 의무와 책임만을 주고 권리와 힘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여성과 인류"에게 굴욕감을 주었고, 그들을 격하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그들이 자유롭고 분별 있는 인간으로, "권리와 능력과 의무와 책임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창조되었음을 주장한다."

p.111
""여성으로서" 또는 "여성의 관점에서" 성서를 읽는 방법은 동일하게 이원론적 성 구조 속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므로 "여성"의 관점에서 혹은 "여성성"의 견해로 성서를 해석하는 것을 자동적으로 여성해방적 해석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방법은 문화적으로 한정된 여 성의 엘리트 이미지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고, 다양하게 억압받는 여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p.123
"해방신학은 여성을 단지 희생자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라, 변화를 위한 원동력으로 이해한다. 현대의 서구 남성 중심적 흐름에서 비평적 해방신학적 틀로의 이러한 변화는 네 가지 변화를 일으키려 한다: 해석학적 가정과 목표의 변화, 방법론과 인식론의 변화, 개인적이고 집 단적인 의식의 변화, 사회 교회적 제도와 문화적-종교적 형태의 변화."

p.126
""남성 중심주의"가 성서적 언어, 문법, 텍스트의 특징이기 때문에, 여성해방적 비평적 읽기는 읽는 행위 속에 "남성 중심주의(혹은 무엇이건 간에)"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지 않고, 그것을 분별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려고 한다."

p.127
"브라질 교육학자 파올로 프레이리는 억압당하는 자들은 그들의 억압을 내재화하게 되고 스스로 내적으로 분열된다는 것을 오래 전에 지적했다: "억압자의 이미지를 내재화해 왔고 그의 정책을 수용해 온 억압당하는 자들은 자유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자유는 그들에게 이러한 이미지를 거부하고, 그것을 자율과 책임으로 대치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끊임없이, 책임 있게 추구되어야 한다.""

p.128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성서 텍스트를 읽는 독자들은 비판적으로 질문하고, 그들의 비전, 가치, 법규에 따라 성서의 해석과 텍스트를 평가하는 해석학적 기술보다 일찍부터 본문에 의거한 안정과 확인의 전략을 발전시키는 것을 배운다."

p.128
"여성신학은 여성이 권위 있는 텍스트를 읽고 내재화하는 방법을 고려하기 위해서 관심을 주중심적 텍스트에서 이동시켜야 한다. 이것은 여성들이 그들의 읽기가 결정되는 방법에 대해서뿐 아니라 읽는 과정에서 그들이 내재화하는 가치의 종류를 의식 할 수 있도록 한다. 성서가 해방 투쟁을 하는 여성에 반대하고 주인지배제를 지지하는 데뿐 아니라, 여성의 자아이해와 삶을 형성하는 데 사용되는 한, 여성해방적 성서해석은 여성들이 텍스트에 비판적으로 참여하고, 그들이 읽은 것을 판단하기 위해서 그들 자신의 영적 권위를 주장하고, 성서 읽기의 과정을 의식화의 과정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p.131 ~ p.132
"비평적 성서학에 대한 수십 년의 저항 이후에 신적 계시에 대한 공의회의 문서는 성서 텍스트의 언어 문제와 역사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비평적 주석을 포함했다. 제2 바티칸 공의회 의 이 문서는 성서가 "쓰여진 기록의 형식 속에 계시를 포함하고 있지만 성서의 모든 것이 계시는 아니다“라는 것을 인정한다. 성서는 ”우리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나님이 원한 진리가 거룩한 문서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확고하고, 신실하고, 실수 없이“가르친다."

p.134
"모든 읽기를 결정하는 지배적 상징적 "의미의 틀"이 주중심적이라는 사실을 의식화함으로써, 비판적 여성해방적 해석은 읽는 주체로서 여성들에게 권위를 부여하고자 한다. 여성들은 텍스트의 의미를 구성하며, 동시에 그들이 그러한 구성의 과정을 의식할 수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성, 인종, 계급이 그들이 읽는 방법에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줌으로써, 해방을 위한 비평적 해석은 독자의 특별한 사회 문화적 위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중심적으로-주인/주/아버지/남 편집중된 상징체계 속에서 읽고 생각하는 것은, 독자들을 문화적으로 "남성"의 정체, 더욱이 엘리트 남성의 정체와 동일시하도록 유혹한다. 그러므로 만약 여성들이 모든 성서 텍스트는 하나님의 흠 없는 말씀이라고 주장한다면, 성서 읽기는 여성혐오주의적, 인종주의적, 서구 우월론적 가치로 우리 스스로와 서로서로를 소원하게 만드는 문화 체제를 여성들이 내면화하도록 신학적으로 강화한다."

p.138
"문법적으로 남성 중심적 언어는 기호들의 닫혀진 체계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문법적 성”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계급, 종류, 범주"를 의미하는 라틴어 genus에서 온 것이다. 문법적으로 남성/여성으로 명사를 구분하는 체계를 도입한 사람은 기원전 5세기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라고 전해진다. 만약 프로타고라스가 예를 들면, 긴 것/짧은 것과 같은 다른 분류 체계를 사용했다면, 서구 언어에 나타난 생물학적 성과 문법적 성의 파괴적인 융합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p.139
"비록 존재들은 성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대부분의 유럽 현대 언어에서 남성보다 우월한 존재들을 그들의 존엄성 때문에 남성으로 이야기한다. 우리의 관념에 따라 남성은 더 고결한 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상숭배하는 국가들은 남신과 여신을 모두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최고의 존재에게 여성의 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p.139 ~ p.140
"언어의 사회정치적이고 역사적 구조에 대한 다른 예가 있다: 1850년 영국 의회는 앞으로 대명사 “그”를 남성뿐 아니라 여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사용할 수 있고, 그러므로 가짜 총칭을 의미하는 "그"로 총칭을 의미하는 "그들"의 사용을 대치할 수 있다는 선언문을 통 과시켰다. 이러한 서구의 언어적 성 체계는 사회정치적 문화적 성 구조들을 구체화하고 자연스럽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언어 체계 속에서, 남성 용어는 "총칭적" 언어의 역할을 함으로써 여성(woman/ female/feminine/she)은 오직 여성적인 것만을 암시하는 반면, 남성 (man/ male/ masculine/he)은 인간과 남성을 의미한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고전 문법체계에 기초한 문법적으로 남성 중심적인 "총칭적" 서구 언어는 법칙의 예외로, 문제로, 특히 개개의 개체로서만 여성을 분명하게 언 급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여성을 의미하는 것이건 아니건 간에 문맥의 언어적 표지들의 빛에서 판결해야 한다."

p.147
"텍스트의 해석은 텍스트 사이의 관계, 읽기 패러다임, 의미의 틀에 대한 독자들의 선택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텍스트는 미리 결정된 읽기의 흔적들 쪽으로 독자들을 강요하는 "닫혀진" 체계가 아니라, 독자들의 사회정치적 협상과 의미의 (재)구성으로 초대하기 때문이 다."

p.147
"언어에 대한 결정론적 이해는 문화적인 비대칭적 성 체계를 독립적이고 자명한 "주어진" 언어 구조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 체계는 남성 중심적, 즉 문법적으로 남성적 언어 속에서 재생산된 것이다. 그것은 문법적 성을 자연적 성과 동일시하고, 그러므로 사회문화적 성 구조를 자연적이고, 상식적이고, 자명한 것으로 구체화한다."

p.156
"내가 이번 장에서 주장한 비판적 여성해방적 성서해석은 해석에서 -말하고 쓰고 읽는 데서- 여성의 목소리, 창조성, 능력을 허락하는 언어 이론을 수용해야 한다. 또한 그것은 전체적인 형식에서 남성 중심적 전통과 방법을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주 의해야 한다. 이것은 여성해방적 해석이 남성 중심적 방법과 이론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매우 비판적이고 선택적으 로 그것을 행하고, 여성의 능력에 기초한 여성해방적 방법과 이론 속에 그것을 통합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여성해방적 역사 적 읽기의 과제는 결핍과 부재로 "여성"을 규정하기보다 모든 새로운 역사적 상황 속에 있었던 여성의 현존에 대한 가정을 정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해방적 해석은 여성의 역사적 현존을 본질적인 형식으로 바꾸어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여성의 현존과 힘을 정치적-역사적 용어로 다듬어야 한다."

p.161
"증가하는 경제적 불확실성과 치명적인 폭력에 대한 반응으로, 대중적 불안과 불확실성을 완화시킬 것을 약속하는 권력을 향한 세계적인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를 위한 방법은 정체가 불분명한 두려움에 호소하고, 우리들 중 가장 약한 자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심각한 위기는 경직된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우리가 모든 사람의 경제적-정치적 행복이 지배하는 급진 민주적 세계 공동체의 세계적인 풍조와 실천을 따르거나, 또는 지구촌이 빈틈 없이 통제되는 다국적 기업의 절대권을 중심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 절대권은 모든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자원을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시키고,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을 영구적으로 가난하게 하고, 비인 간화된 하층 계급으로 전락시킬 것이다."

p.163
"교의적 문자주의는 성서를 기독교인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직접적이고 무흠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한다. 언어적 무흠성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성서와 그에 대한 해석이 이데올로기와 특수성을 초월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성서 텍스트와 해석에 반영된 관심들을 모호하게 하고, 믿음을 삶의 방식이기보다 지적인 동의로 축소시킨다. 이러한 계시 실증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 성서에 대한 믿음을 증진시킨다."

p.168
"비록 church라는 영어 단어가 Kyriake -주/남자 주인/아버지/남편에게 속해 있는-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지만, ekklesia라는 그리스어를 보통 “교회”로 번역한다. 따라서 에클레시아를 "교회"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에클레시아는 "민주적 회합/완전 시민의 모임"으로 가장 잘 표현된다. 에클레시아/민주적 회합을 Kyriake/교회로 옮긴 번역 과정은, 민주적 모임이나 평등 제자직 형태보다 교회의 주인지배적/계급조직적 형태에 특권을 주었던 역사를 나타낸다."

p.169
"참으로 해방을 위한 여성신학은 인간의 자유, 존엄성, 행복(에클레시아)을 위한 갈등과 투쟁의 역사와 바실레이아-가난, 배고픔, 고통, 집 없음, 살인, 불의가 없는 하나님의 다른 사회와 세계-의 성서적 비전 안에 자리 잡아야 한다."

p.170 ~ p.171
"예수의 바실레이아 비전을 따른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약속받았다. 평등한 제자들의 이 새로운 "가족"에서는 누군가를 "아버지"로 부르는 것(마 23:8-11), 혹은 모 성을 근거로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금했다(눅 11:27-28). 이 새로운 가족 공동체에 "아버지"가 없는 한, 그것은 가부장적 사회종교적 힘과 위상을 은연중에 거부한다."

p.171
"아버지/주/남자 주인의 지위에 주어지는 명예와 존중이 아니라, 아이/노예의 명예와 존중이 이러한 제자직을 평가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역설적인 예수의 말 속에서 강조된다: "누구든지 어린아이/노예와 같이 하나님의 바실레이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막 10:15). 이 말은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함과 순진함으로의 초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힘에 대한 모든 욕구를 포기하라는 도전이다."

p.172
"북왕국의 예언자적 배경을 갖는 이 전승들은, 그 용어의 왕적 의미에 반대하는 민주적 의미를 주장한다. 북왕국의 전승에 따르면, 야웨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했고(수 24:7) "제사장과 거룩한 민족의 바실레이아 (출 19:4 6)로 부름을 받은 그 백성들과 계약을 맺었다(출 3:913). 이 전승들은 왕권과 군주제에 대해서 비판적이다(삿 9:8-15의 요담의 우화). 군주제는 군국주의, 경제적 착취, 노예 제도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그 전승들은 군주제를 하나님의 나라를 거절하는 것으로 간주한다(삼상 8:1-22). 왕을 요구함으로써 (삼상 12:1620) 백성들은 (그들을) "억압했던 모든 나라들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고 구원했으며, "그들의 모든 고통과 환란에서 (그들을) 구한" 하나님을 거절했다(삼상 10:17-27, 특히 18-19절 이하; 호8:4; 9:15). 이 전승에서, 왕적 지배나 주인지배제는 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제도이다."

p.174 ~ p.175
"메시아의 몸의 정치 안에서 모든 사람은 성령의 은혜에 똑같이 다가갈 수 있다. 성령 안에서의 이 평등성은 모든 사람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회원들의 은혜는 다양하고, 그들의 개인적 역할을 대치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누구도 더 우월한 역할을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역할들이 필요하고, "조합"을 이루기 위해서 똑같이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연대와 협력은 "영적인" 혹은"은혜가 있는" 민주주의로 가장 잘 특성화될 수 있는 정치적 질서(그리스도의 정치 질서, politeuma)를 위한 "시민적" 덕목이다."

p.199
"비판적 해방론적 해석학의 우선적인 신학적 과제는 성서 텍스트와 그에 대한 해석이, 불의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주인지배적 풍조와 비인간화하는 종교적 비전을 얼마나 많이 조장하는지에 관해서 성서 텍스트와 그에 대한 해석을 세밀히 연구하고 구분하는 데 있다."

p.199
"성서 텍스트와 그에 대한 해석 속에 나타난 주인지배적 수사학과 종교적 정체성의 형태를 의문 없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것을 해석의 과정에서 정당화한다면 성서 텍스트와 그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종교적 편견과 억압의 관계를 계속해서 되새기게 된다."

p.203 ~ p.204
"가정 폭력을 다루는 학자들을 조사하면서, 위니 브라인스와 린다 고던은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가정 폭력"과 특히 "매맞는 아내"라는 용어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관찰했다. 왜냐하면 아동 학대, 매맞는 아내, 근친상간 등을 "개인적"이거나 "사적"인 가정 문제로 치부하고, 심각한 사회적 쟁점으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가정 폭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테레사 드 로레티스에 따르면, 이것은 그 분야의 대부분의 연구가 자신이 연구하는 용어를 분석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p.206
"진실한 남성다움이 자유, 자율성, 평등의 실천 속에서 실현되는 반면, 완전하게 실현된 여성다움은 아마도 낭만적인 사랑과 자기 희생적인 모성 속에서 드러난다. 인쇄 매체와 방송 매체를 통해서 무차별적으로 선언되는 여성다움이라는 문화적 풍조는 진실한 여성들은 이성애적 사랑, 결혼, 자녀들 속에서 그들의 성공을 찾는다는 개념을 우리 모두에게 강권한다."

p.206 ~ p.207
"복종과 지도력에 대한 전통적 개념과 낭만적 이성애적 사랑에 대한 현대적 개념의 융합이 오늘 날 가부장적인 주인지배적 억압 관계의 중심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여성들과 그들의 자녀에 대한 가정 폭력은 논리적 결과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는 문화적 경계가 없다. 그것은 특별한 계급, 지리적 영역, 혹은 인간의 유형에 제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적 차이와 신분을 넘어선다. 모든 범주의 다양한 여성들이 모두 끊임 없는 폭력에 시달린다. 이유는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p.209
"신문 잡지의 이야기, 심리적 담론, 법정심리, 종교적 도덕적 규칙, 성서적 율법은 모두 희생을 부추기는 데 책임이 있는 가해자보다 희생당한 여성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었다. 더욱 나쁜 것은 여성의 희생이 종종 스스로의 죄로 내재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p.211 ~ p.212
"여성학은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사회화가 남성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며, 자녀가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는 신념을 그들에게 세뇌시켰기 때문에, 모든 계급의 여성들이 계속해서 "스스로를 위험 지대에 놓는다"고 지적했다. 남성에 대한 그들의 매력 그리고/또는 어머니로서 그들의 성공이 여성들의 자아 가치와 자존심을 계속적으로 규명한다."

p.218
"복종과 그것이 수반하는 덕이라는 주인지배 적 정책에 대한 기독교적 선포는, 하나님과 사랑의 이름으로 희생이라는 가부장적-주인지배적 실천을 기독교적 덕으로 은밀하게 증진시킨다. 복종이 수반하는 덕으로는 자아 희생, 온순, 비위맞춤, 순종, 고통 감내, 무조건적 용서, 남성적 권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 등이 있다."

p.220
"성서 텍스트는 의미에 대한 가부장적-주인지배적 정책과, 주인지배적 가족 관계와 교회 구조를 유지하는 우두머리 지위에 대한 신학적 가르침을 만들어낸다. 남성의 머리됨과 주인지배적 권위에 대한 기독론적 교의는 여성목사 안수 불허를 정당화한다. 그리고 남편과 교회의 "머리됨" 때문에 자연적이고 영적인 "아버지들" 때문에 교리는 기독교인 어린이와 여성이 성적 학대에 저항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p.222
"만약 우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종한" 그 리스도의 침묵하면서 자유롭게 선택된 고난(빌 2:8)을, 가정폭력과 성폭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찬양한다면, 그것은 여성들과 아이들에 대한 폭력을 단순히 정당화할 뿐 아니라 조장하는 것이다. 리타 나카시마 브록의 연구는 주인지배적 복종의 패러다임 안에서 분명해진 기독론적 담론이 “아동 학대를 세계적 범위로 재가하는 거룩한 힘의 관점을 반영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p.223
"대리 희생자(surrogate victims)의 희생은 전체적 폭력을 억누르거나 중지하지 못한다. 오히려 폭력을 조장함으로써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폭력적인 저항으로부터 힘있는 자들이 자신들을 보호하는 데 사용된다.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거나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서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말하면서, 그의 죽음의 사회정치적 원인에 대해서 침묵하고, 그를 전형적인 희생제물로 만드는 신학은 체제에 저항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믿는 자들에게 힘을 주는 대신, 주인지배적인 모든 폭력과 희생을 지속시킨다."

p.227
"끈질기게 믿는 기도자가 극복해야 하는 장애가 종종 있다."

p.230
"무엇보다도 이 비유(눅 18:2-5)의 과부를 사회 체제의 피해자로 보는 것은 그녀가 공동체의 자율적인 구성원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이러한 읽기는 폭력적인 가정 상황에 있는 여성들이 여전히 그들에게 유용한 저항과 생존을 위한 "힘"과 수단을 인식하고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 버린다."

p.230
"모든 유대 과부들이 가난 때문에 고통당하고 남성 후원자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과부는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으며, 만약 그녀가 남편의 유언에 따라 상속인으로 선정되었다면, 남편의 재산을 상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딧서는 이러한 돈 많고 독립적인 과부를 그리고 있다."

p.265
"비록 하나님이 억압 “너머에” 있지만, 하나님의 계시적 현존을 비인간화와 불의에 대한 투쟁 안에서 경험할 수 있다. 억압적인 구조와 비인간화하는 이데올로기의 변화와 변혁을 위해서 투쟁하는 여성의 경험 속에서 거듭해서 새로운 이름을 신에게 부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가운데 있는 행복을 위한 적극 적인 힘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여성신학은 신적 지혜에 관해서 말하는 소피아론이 된다."

p.267
"강인한 과부의 이야기이다(눅 18:1-8). 이 이야기는 정의를 위해서 끈질기게 일하는 강한 여성으로 지혜를 그린다. 불공정하고 사악한 도시의 재판관은 결국 그녀에게 항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관은 하나님을 나타내지 않는다(종종 가정되는 것처럼). 그는 백성들의 권리나 하나님의 법을 돌보지 않을 뿐 아니라, 오직 자신의 성공에만 관심을 갖는 타락한 재판 체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의 권리를 위해서 강력하고 끈질기게 투쟁하는 소피아의 딸들이 이러한 노골적인 불평등의 상황을 위협할 때에만 이 상황은 바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과부가 정의에 대한 그녀의 요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정의를 위해서 강력하게 싸우고 악을 바로잡는 자로 신적 지혜와 그녀를 따르는 자들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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