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제자리에 있다는 것 본문

클레르 마랭 지음. 황은주 옮김. 에디투스.
나는 떠난 사람일까, 자리를 잡은 사람일까.
정답은 언제고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도 그렇게 말한다.
이 소임이 나의 소임이 맞을까, 지금 이 분원이 진짜 나의 자리일까, 이 삶으로 정말 나를 부르셨을까... 수도 없이 생각했던 질문들이다. 어느 사막 교부가 어떻게 해야 수도승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내가 누구인지를 매일 물어야 한다'고 대답했다던데, 나도 20년이 넘도록 그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조금씩 깨달았다. 소임으로 내가 온전히 규정될 수 없고 소속된 수도회가 내 수도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사막교부의 말씀처럼, 매일 내 발 디딘 곳을 보며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가늠할 때, 내가 나 자신으로 온전히 있을 때, 그것이야말로 나의 제자리겠지.
시간은 좀 걸렸지만 정말 좋은 책을 읽었다. 저자는 나의 자리만을 사색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나의 자리가 나의 있음만으로 정의되지도 않았다. 어쩌면 머무는 곳이 나의 자리가 아니라 안주한 곳에서 용감하게 떠나는 발길이 나의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제자리.
p.10
"어떤 사건이나 재앙으로 인해 자리를 빼앗기고 나서야 그동안 그 자리의 한계에 얼마나 갇혀 있었는지 깨닫기도 한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이러한 강제적인 자리옮김deplacement은 박탈보다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p.10 ~ p.11
"내 자리라고 말하는 이곳이 반드시 최선의 장소가 아닐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를 제약하는 자리, 너무 비좁은 자리를 운명이라 믿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너무나 협소한 것이 분명한 자리를 적합한 자리라고 확신하게 되는 이유와 논리는 무엇일까?"
p.10
"때때로 스스로 선택하여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한 곳에서 불시에 쫓겨날 때가 있다. 한때 그 자리가 정당하게 주어진 것이자 확실한 것, 마땅히 누려야 할 것으로 여겨졌던 것은 우리를 그곳에 던져둔 우연이라는 요소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p.11
"우리는 제자리를 잃거나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꼭 맞지 않더라도 이미 속해 있는 정서·관계적 공간에 안주한다. 우리는 자리가 안정과 지속성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자리는 질서에 대한 욕구, 규정되고 식별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 줄 때가 있다."
p.14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자리 없이 사이에 존재하는 상태를 불안정한 균형, 취약성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여러 언어와 문화, 존재 방식 사이를 넘나드는 것이야말로 불화하는 자들의 강점이 아닐까? 변동성과 유연성, 타자가 되는 능력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을까?"
p.16
"우리는 여백에 기록하기도 한다. 본문과 나란히 가장자리에 기록된 것은 의미의 개인적인 재전유, 성찰, 권위로부터 거리두기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가장자리에 기록하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로, 언젠가 여백에서만 자신을 주장하던 그 목소리가 텍스트의 심장부를 구성하는 날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p.21
"우리는 "머물 곳residence”을 찾는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원에서 알 수 있듯 머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운동 mouvement을 멈춘다는 의미다. 라틴어 residere는 움직이거나 서 있으려는 노력을 끝내고 앉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편력과 자리 옮김을 중단하고 멈추어 정착하는 것, 움직이는 상태이길 그만둔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하강,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 자세를 낮추어 자리 잡고 앉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라틴어 residere는 산이 무너져 내리고, 파도가 잔잔해지고, 불길이 잦아들고, 바람이 약해지는 것을 묘사할 때도 쓰인다. 그러므로 거주한다는 것은 보다 차분하게 누그러진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다. 운동하는 삶의 격렬함과 충동, 강렬함을 잃어 버린다는 의미기도 하다."
p.26
"정리는 왜 그렇게 어려울까? 그건 아마 우리가 으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모든 것에는 하나의 확실한 자리가 아니라 여러 가능한 자리들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p.29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세계를 상상해 볼 수야 있겠지만, 모든 자리가 미리 정해져 있는 세계는 경계해야 한다."
p.38
"왜 떠나야 하는지, 왜 그 자리에서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은지 그들이 항상 아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어렴풋하지만 거의 육체적인 느낌으로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음을 안다. 출발은 그것이 도망일 때조차도 설명할 수 없는 필연의 명령으로 부과된다. 이유와 명분을 찾으려 한다면 찾을 수도 있겠지만, 다른 곳을 향한 이 욕구에 자유 외에 다른 이름은 없다."
p.39
"출발은 자신의 대립항인 기계적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경직되고 죽은 것, 생동감 없이 작동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기계적 습관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에 복종한다. 그것은 최면 상태, 나른한 삶, 절반만 깨어 있는 의식이다. 또한 그것은 반쪽짜리 삶이다. 무기력하고 반복적이며 어떤 동기도, 열망도, 충동도 깃들지 않은 삶이다. 현전 없는 삶이고, 강렬함 없는 삶이며, 자기 자신이 없는 삶이다."
p.41
"“떠나는 사람은 언제나 욕망과 두려움 사이의 불안한 떨림을 유발하며, 만장일치의 반대를 불러일으킨다. (•••) 그러나 그가 그렇게 떠나 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한자리에 머물 수가 없는 것이다. 떠나는 사람은 혼자만의 힘으로 시간의 끈을, 세월과 세계의 질서를 깨뜨린다. 그는 질서정연했던 선이 얽히거나 끊어질 수 있음을, 시간의 음악이 다양할 수 있음을, 자신의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p.46
"누군가가 우리를 예전의 자리로 영원히 되돌려놓으려 한다면, 우리의 출발을 일종의 배신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 출발을 동일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자신의 삶에 의문을 제기하고 부인하는 것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를 통해 자신의 좁은 시야 너머의 가능성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p.51
"새로운 마을과 집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뿌리 뽑히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은 그저 되는 일이 아니다."
p.62 ~ p.63
"캉탱은 낙인의 힘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사람이 사회적 삶에 온전히 참여하기를 근본적으로 방해하는 것은 신체 장애가 아니라 사회가 그에게 투사하는 신화와 표상들의 그물망이다.""
p.62
"이러한 시련은 공공장소에서의 제약으로 인해 불편을 겪는 사람들에게 매일 반복된다. 그들에게 공공장소가 통행 불가 지역이 된 것은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것도 자신의 치수에 맞춰지지 않은 공공장소에서 제자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가 있다면, 그 책임은 사회에 있다고 해야 한 다."
p.62
"베르트랑 캉탱의 말처럼 장애인les personnes en situation de handicap이 '장애'를 갖게 되는 것invalidées은 사회가 내린 선택에 의해서라고 할 수도 있다."
p.63 ~ p.64
"캉탱은 장애인들이 완전히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안쪽에 있는 것도 아닌 채로 사회의 문턱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다고 주장하며 한계성liminalite' (라틴어로 limen은 '문턱'을 의미한다)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기술적 차원에서 접근성을 다시 사유하고, 샤베르가 주장하듯 그것이 지닌 관계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장애 자체를 없앨 수는 없을지라도 타인에게 자리를 마련해 줌으로써 장애를 완화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약간의 도움만 있어도 접근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곳에서 기술적 난점을 들어 문제를 회피할 때가 있다. "접근성은 넓은 문이나 경사로의 문제가 아니라, 환대와 팀워크와 같 은 인간적 문제다." 공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청각장애인을 대화에 참여시키기 위해 그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과 같은 몇 가지 간단한 조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장애인을 대신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 의사결정을 할 때 장애인을 포함시키고 그들의 경험에 기대는 것이기도 하다. 캉탱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장애인은 자신의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어떤 자원을 동원해야 할지 파악하는 데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사고방식의 폭이 조금이라도 넓어지길 바랄 수 있을 것이다."
p.67
"여성이 자신의 외양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조차 침범의 결과이며, 여성을 짓누르는 기대로 인한 것이다. 자기 관리는 눈속임이거나, 자신과 맺는 진정한 관계가 반영되는 경우조차도 외부의 명령에 대한 반응이다. 자기를 위한 자기 관리이기보다는 타자를 위한 자기 관리인 것이다. 몸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여성이 계속해서 사회적으로 존재해 나갈 수 있기 위한 조건이다. 자신을 돌보는 것조차 사회의 암묵적인 요구사항이다. 이때 돌봄은 자신과 섬세한 관계를 맺으면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과 기쁨 대신 내면화된 기대가 초래하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p.68 ~ p.69
"어머니는 결핍, 공백이 있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되고, 냉장고와 찬장을 채우고, 아이의 몸에 맞게 옷을 입혀야 한다. 어머니는 우리 삶의 연속성을 직조해 내고, 다나오스왕의 술통-이는 아이들의 필요, 남자들의 욕망, 일상생활의 유지에 대한 메타포다 -이 비어 있지 않게 해야 한다. 공허와 균열을 메워 숨겨야 하며, 침묵을 채우고 부재를 벌충해야 한다. 어머니의 파편화된 시간은 틈의 존재를 잊게 하고, 중단과 흠, 타인의 실존에 생긴 불연속성를 감추는 데 바쳐진다. "그녀는 다른 사람, 가족구성원들, 외부 기관의 시간표에 맞춰 자신의 시간표를 그려야 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시간의 불연속성으로부터 고요하고도 명백한 연속성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어머니 자신의 시간은 그만큼 더 파편화 된다."
p.89
"실제로 우리는 어떤 곳에도 뿌리내리지 않는 것을 강점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정된 자리가 없다는 것, 하나의 사회적 공간에서 다른 사회적 공간으로, 하나의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 다른 사람들의 자리에 처함으로써 그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 역시 하나의 특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p.91
"진정한 장소는 화살이 과녘에 꽂히듯 도달하지 않는다. 그곳은 우리가 도는 곳, 언뜻 보기에 우리를 방해하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우리를 방해하는 바로 그것 덕분에 도달하게 되는 곳이며, "방해라고 생각 했던 것들"은 소재가,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현실"이 된다. 이런 식으로 인생에서 놓쳐 버린 것, 실존적 실패, 나쁜 선택, 잘못된 길들은 좌절의 순간을 만들기도 하지만 패주 속에서 나를 구성해 내는 역설적 경험을 가져다주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조품 같은 삶을 산다는 느낌이야말로 새로운 필요에 대한 감각, 실존과 맺는 다른 관계에 대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p.91
"진정한 장소는 그저 장소가 아니라 활동이자 존재 양상이다. 진정한 장소에 있을 때 주체는 그곳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 흡수되며, 그 지배력 속에서 오히려 순수한 활동성, 존재감의 강화, 꽉찬 현존을 느낀다. 그러한 장소에서 우리는 에르노의 말처럼 "존재한다는 것을 가장 잘 느끼"는 것이다."
p.92
""글쓰기는 ‘진정한 나만의 장소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내가 자리한 모든 장소 중 유일하게 비물질적이며, 어느 곳이라고 지정할 수 없지만, 나는 어쨌든 그곳에 그 모든 장소가 담겨 있다고 확신한다."(아니
에르노)"
p.92
"각자의 고유한 내적 필연성에 따라 우리가 있어야만 하는 장소에 있을 때, 그곳은 힘의 느낌을 끌어낸다. 그것이 외적으로는 억제와 제한이라는 형식을 띤다 해도 - 그 활동에 내 모든 것이 온전히 동원된다 해도, 그 내적 현실은 주체의 역량 증진, 창조 능력의 본질적 긍정이라는 형식이다."
p.118
"우리 각자는 밖에서 식별할 수 없는 자기 존재의 한 부분 안에 거주한다."
p.130
"내가 "바로 여기" 위치할 때, 현전할 때, 나는 제자리에 있는 것이다."
p.153
"어쩌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유년기의 구멍을 메워나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첫 순간에 입은 상처들을 치유하고, 한 때 자신이었던 아이, 이따금 우리가 완전한 어른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그 아이를 돌보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물건을 고치고,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일인칭으로 이야기하고, 관점을 재정립하기 위해 역사를 기록한다."
p.154
"때로는 타인의 말 몇 마디만으로도 손상된 옛 사진을 복원하듯 민감한 과거를 치유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의 경련을 진정시킬 수 있다."
p.157 ~ p.158
"갓난아기가 자신을 안아주는 부모의 팔 덕분에 자의식을 갖게 되는 것처럼, 우리 존재가 구체화되고 실존이 밀도와 현존을 얻게 되는 것도 타인의 손길,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다. 그러한 팔이 없을 때,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애정과 관심을 기대할 수 없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지지대를 선사하는 낯선 이가 나타나 우리로 하여금 부유하는 실존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다가설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머리에 얹은 손, 짧은 한 마디 말은 내면의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가 된다."
p.165
"데리다가 말하듯 실향민들에게는 이중의 자리, 즉 정서적 공동체와 모국어라는 상징적 고향이 모두 결여되어 있다. 망명자들과 실향민들은 역사의 부침에 의해 공동체로부터 난폭하게 내쫓긴 사람들이다. "내 집”에 있다는 것은 몸짓과 생각이 제 집처럼 편안하여 안정감과 친숙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고, 유대의 끈이 살아 있는 곳에서 의도를 왜곡하거나 배반하는 법 없이 말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p.168
""어쩌면 뿌리내림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인간 영혼의 욕구일 것이다. 그것은 가장 정의내리기 어려운 욕구이기도 하다. 인간 존재는 과거의 소중한 유산과 미래에 대한 예감을 살아 있게 해 주는 공동체의 실존에 현실적이고 능동적으로 자연스럽게 참여함으로써 하나의 뿌리를 갖게 된다."(시몬 베유)"
p.171
""떠난다는 것은 물론 움직이는 것, 어떤 장소로부터 벗어나고, 멀어지고, 거리와 부재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떠난다는 행위에는 물리적•가시적•즉각적•신체적 현존의 중단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다. 떠난다는 것은 사라지고 지워질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아쉴 음벰베)"
p.172
"남자들과 여자들, 아이들이 겪어낸 개인적 재앙의 규모가 어떠하든, 그들이 겪은 공포에 조금도 영향받지 않은 채 제자리를 지키는 무관심한 세상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아이러니이리라. 세계는 끄떡없는 안정성으로 그들의 고통을 모욕한다. 이처럼 동요 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세상보다는 그들의 내적 혼란과 조응하는 폐허가 차라리 나을 것이다."
p.175
"우리는 어쩌다 타인의 자리에 배치될 때 타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이해하게 된다. 비자발적인 자리옮김으로 타인의 입장이 되어 봄으로써in their shoes 우리의 두 눈은 더 밝아지고, 세상을 보는 시야 역시 넓어진다."
p.175
"우리가 자신의 결점을 기꺼이 인정다면, 우리는 우리가 넘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가 "지나가며" 한 말, 불쑥 튀어나온 말이 은밀하게 우리의 가장 강력한 의도를 요약하기도 한다."
p.181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자기 것인 장소를 갖는 일이 아니라 나만의 장소, 자기 안의 장소를 갖는 일이다. 무언가 활기찬 일에 적합한 장소, 의무를 부과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창조하고 성찰할 수 있는 장소 말이다. 어쩌면 현실의 장소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오판일 테다. 우리가 창조해야 하는 장소는 외적이고 물질적이며 구체적인 것만큼이나 내적이고 심리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p.190
"거울과 마찬가지로 가상 이미지는 “거기 비친 내 모습 - 우리는 그 이미지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픈 유혹을 받는다 - 을 바라보는 동안 차지하는 자리를 절대적 으로 현실적인 동시에 (••) 절대적으로 가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공간, “우리 자신이 실제로는 제대로 정돈되지 못하고 뒤죽박죽”인 만큼 "완벽하고 잘 정돈되어" 있는 "보상"의 공간 속에서 피난처를 찾는다."
p.191
"공간배치들, 지리•사회적·정치적 상황, 이따금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제도, 병원, 양로원 등 사회의 변두리에서 맞닥뜨리는 폭력, 일회적이지만은 않은 배치도 위에 놓이게 하는 사회적이거나 가족적인 상징 체계 등은 모두 "제대로 정돈되지 못하고 뒤죽박죽”인 이 세상에서 우리가 열망할 수 있는 자리, 우리에게 마련되거나 봉헌되거나 금지된 공간에 대해 무언가 말해 주며, 이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p.191 ~ p.192
"그러나 우리는 또한 자신의 자리에서 말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제 목소리로 말하는 것, 제자리를 주장하고 실존을 주장하는 것, "자리 안에 존재"하고 자리를 차지하는 것 역시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목소리를 통해 하나의 자리를 제 것으로 만든다. 들뢰즈가 일러주듯 영토는 무엇보다 소리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곳,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에서 나는 자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나를 위한 자리를 만들며, 그것을 쟁취해 낼 수 있게 된다."
p.195
"우리를 평가절하하는 자리, 낙인 찍거나 비가시적인 존재로 만드는 자리들. 원치 않았는데도 상속 받아야 하는 자리, 그 누구도 원치 않는 자리, 정체시키는 자리, 처음부터 정죄하는 자리들. 우리는 "모두가 제자리를 지켜야" 하는 "정상적인" 세상의 폭력성을 안다."
p.196
"지리적으로나 상징적으로 내가 아무리 멀리까지 가더라도, 그것은 놀랍게도 결국 나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게 되는 기나긴 여정,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기나긴 우회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p.197
"우리의 심리적인 삶은 끊임없는 내적 이동,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움직이는 긴장으로 이루어진다. 무의식의 장소론topique은 역동적 위상학topologie이며, 거기서 주체는 항상 여러 장소에 동시에 존재한다. 어쩌면 우리는 결코 자기 안에, 자신만의 고유한 자리에 있지 못한다."
p.199 ~ p.200
"우리는 각자 근본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어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돕거나 구원할 수 없다. 행복할 때나 슬플 때나 그들은 대체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러나 나는 내 안에 타인을 위한 자리, 그들의 경험과 사고방식과 감정을 위한 자리를 남겨둘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마음의 예의"라고 부른 것의 심원한 의미이며, 이는 상대에게 모든 자리를 내어주는 재량이자 겸허함이다."
p.199
"내가 항상 타인의 자리에서 그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체할 수 없는 자리, 상상할 수 없는 경험이 존재한다. 우리의 자 리가 늘 상호교환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나는 너의 아픔을 대신 앓을 수 없고, 너를 대신하여 아이를 가질 수 없으며, 너를 위해 그 고통을 겪어낼 수 없다."
p.199
"우리가 차지하는 공간보다 더 넓은 내적 자리를 사유할 수 있다. 유연하고 여유 있는 자리, 나만의 자리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타인을 이해할/포함할comprendre 수 있는 자리를 말이다."
p.200
"우리는 멀리 있는 바깥의 존재이길 그치고 가깝게 감지할 수 있게 된 타인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배가시키고 수천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곧 나의 삶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타인의 자리에 서서 그를 더 잘 이해하고, 지지하고, 돌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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