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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타사르와 함께 말씀 안에 머물기 본문

雜食性 人間

발타사르와 함께 말씀 안에 머물기

하나 뿐인 마음 2025. 12. 6. 22:31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지음. 서명옥 옮김. 가톨릭출판사.

 

두 번째 30일 피정을 마친 후 평생 간직하며 기도하고 싶은 지향을 나누는 자리에서 나는 '신심 깊은 수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무조건 하느님'을 외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을 갖고 싶었던 것이었다. 인간적인 나는 부족하고 얕고 수시로 넘어지지만, 그래도 끝내 '하느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성령처럼 아우르는' 수녀가 되고 싶다.

 

내가 평생동안 잘 해내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면, (잘 해낸다는 표현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일이긴 하지만) 성경을 묵상하고 말씀으로 깊이 기도하는 것이다. 내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지만 노력없이 가능한 일도 아니다. 표가 나지도 않고 인정을 받는 일도 아니지만 매일 그분의 말씀 속에 깊이 잠기고, 내밀한 기쁨 속에 머물고 싶다. 

 

곱씹을 문장이 많은 책이었다. 그렇더라도 하나를 굳이 고르자면 "묵상은 받아들일 것을 위한 공간이 있도록, 내적 고요와 텅 빔을 만들어 내라는 요구로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하느님께로 가는 통로를 낼 필요가 없다. 아이가 해야 할 '준비'는 그냥 아버지의 품으로 뛰어드는 것이다."이다. 마음에 잘 새겨두고 싶다.

 

뒤로 갈수록 문장이 어려웠다. 발타사르 신부님이 어렵게 쓰신 건지, 번역이 까다로웠는지는 알 길 없지만 발췌한 구절만으로도 충분하다. 신부님의 시선은 조금 더 배우고 싶기에 다른 사람의 번역인 < 발타사르, 예수를 읽다>를 읽어 보고 싶다. 

 

 

그분 말씀에 다가가는 일은, 나 자신을 투명하게 지우고, 깨끗하게 비워서 다시 나를 충만하게 채우는 일이다. 말씀 묵상이 나 자신의 일부가 되길, 말씀이신 그분이 나를 온전히 차지하시길, 내 생명의 깊은 원천은 다름 아닌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시길...


p.18
"그리스도교 묵상은 오직, 하느님의 자기 진술인 이 사람, 예수님을 사랑하고, 숙고하며 따르는 묵상만이 중심이 될 수 있다. 그분은 하느님의 해석이며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가르침이다."

p.27
"묵상은 받아들일 것을 위한 공간이 있도록, 내적 고요와 텅 빔을 만들어 내라는 요구로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하느님께로 가는 통로를 낼 필요가 없다. 아이가 해야 할 '준비'는 그냥 아버지의 품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p.28 ~ p.29
"무엇인가를 듣고자 하는 사람은 고요한 상태로 들을 준비를 해야 한다. 스스로 말하거나, 자신의 생각, 바람, 걱정들이 그 안에서 시끄럽게 굴면 그것들이 내는 소음으로 인해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묵상에 대한 모든 규정은 받아들일 것을 위한 공간이 있도록, 내적 고요와 텅 빔을 만들어 내라는 요구로 시작된다. 보통은 "차단", 무질서하게 흩뿌려진 의식의 "집중", "내면으로 가는 신비스러운 길" 걷기 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순전히 부정적인 면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이 없으므로 그러한 준비가 필요 없는 다른 형태의 묵상과 그리스도교 묵상을 구별하는 적극적인 경청 의지로 꼭 이어진다는 것에 대해선 당연히 의심할 수 있다."

p.29
"그리스도교적으로 요구되는 침묵은 근본적으로 인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 오히려 믿는 이[신자]는 자신이 들어가야 할,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되는, 조용하고 숨겨진 골방"(마태 6.6)을 언제나 이미 자신 안에 그리 고 동시에 하느님 안에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p.29 ~ p.31
"양팔 저울로 달아 보면 한쪽에 올려진 우리 세속적 걱 정과 편견은 언제나 위로 오르는 데 반해 다른 편에 올려 진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의 존재는 언제나 내려간다. 이 는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 존재가 "그지없이 더 큰 의미"
(2코린 4,17 참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하느님께로 가는 통로를 만들 필요가 없다. "우리의 생명은" 언제나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콜로 3,3 참조).
따라서 묵상을 준비하는 데에 먼저 길고 긴 심리학적 전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중심과 요점이 이미 늘 존재하는 믿음[안에서]의 간단한 깨달음만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듯 여겨지지만, 그분은 우리 가까이에 계시다. 그러니 그분께 가까이 가려고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 비유가 묘사해 주는 것과 같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그러자 수없이 되뇌며 익힌 아들의 말이 따른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루카 15,19)
그러나 아들의 이 말은 이미 집으로 불러들이는 아버지의 몸짓을 앞지르지 못한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루카 15,22)"

p.34
"청원은 아무 형태 없는 공허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것도 기대하려 들지 않고, 지금 여기 이 묵상 가운데 나에게 특정한 선물을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향해 나아간다. 곧 이런 마음이다. 당신께서 제게 보여 주고 선사하고자 하시는 그것을 당신께 원하나이다."

p.66
"변화는 결국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나,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바라보시는 그분의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다."

p.73
"구세주의 잉태와 탄생과 죽음은 큰 소리지만 들리지 않는 말이다."

p.79
"우리는 두드릴 수 있고 또 두드려야 하지만, 우리가 두드린다고 해서 반드시 열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두드림에는 그러한 마법적인 힘이 들어 있지 않다."

p.88
"“영혼을 가득 채우고 만족시키는 것은 많은 것을 아는 데 있지 않고 어떤 것을 내적으로 느끼고 맛보는 데에 있다.”(<영신수련> 2항)"

p.107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천 번을 태어나신다 해도 / 네게서 태어나시지 않는다면, 너는 영원히 길을 잃을 것이다.” (안젤루스 실레시우스)"

p.111
"우리가 묵상하는 것, 곧 예수님의 신비 중 하나는 우리와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우리 안에 있다."

p.118
"그리스도교 묵상은 개인적 영성을 위한 것에 그치지 않으며 교회적 차원 안에서 이뤄진다.
교회는 말씀을 보존하고, 해석하며 성찬례 안에서 구체적으로 현존하게 한다. 그러므로 묵상은 교회의 신앙과 분리될 수 없으며, 교회적 공동체의 유산에 뿌리를 둔다."

p.133
"결코 그분의 보편적 의도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그분의 성체적 헌신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모든 이의 죄를 짊어지신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을 다 포함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것을 깨달으면서 묵상하는 이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헌신과 동시에 주님께 대한 헌신으로 자신을 봉헌할 것이다."

p.133 ~ p.134
""수치페, 도미네Sucipe, Domine", "주님, 제가 바치는 것을 받아 주소서."라는 청원 옆에 다른 말이 놓여 있다. 바로 수메sume"이다. 이는 '어쩌면 제가 감히 내놓을 수 없는 것, 제 개인적 존재[삶]에서 당신의 보편적인 의도에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 것까지 빼앗아 없애 주십시오.'라는 의미다."

p.134
"개인[의 경계]과 교회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본질에 속한다. 따라서 묵상에 세상을 포함시키는 것은 결코 산만함의 성격이 아니며, 본질적인 것에 대한 집중에 속하는 일이다. 바로 그분의 계시 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집중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집중은 우리가 묵상 가운데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할 때만 일어난다."

p.136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서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 묵상을 통해 이중적 정체성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묵상은 세상 속에서 사는 구체적인 삶과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그 삶의 깊이를 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묵상으로 얻은 깨달음은 세상에 대한 책임감으로 이어져야 한다."

p.138 ~ p.139
"세상 속 하느님의 편재(遍在)뿐 아니라 세상과 함께하시는 그분의 구원 의도의 보편성 덕분에, 우리는 세속적 일상에서도 기도나 교회의 예배에서보다 하느님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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