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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 본문

雜食性 人間

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

하나 뿐인 마음 2025. 11. 1. 14:07

로널드 롤하이저 지음. 이선정 옮김. 생활성서.

레벨1 과 레벨10 밖에 없는 것처럼 극과 극을 치닿는 시대, 고통이 부정적으로만 이해되고, 큰 잘못기이기에 반드시 피해야 하고, 매사에 불필요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한 번쯤 짚어봐야 하지 않나 싶은 내용이었다. 얼마 전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보면서도 느꼈던 것과 이어진다. 고통 앞에서 한없이 무너지는 환자들을 만나면서 자주 고민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겪어야만 하는 것이 있고 홀로 혹은 함께 떨쳐내야 하는 것도 있는데 과정을 훌쩍 뛰어 넘고 어려움은 면제 받아서 도달하는 곳은 과연 어디인가 말이다.

제목이 너무 강하게 와닿아서 홀린듯 구매했는데, 홍보로는 효과 좋은 제목이었다.  약간 의미가 상통하긴 하지만 정작 책의 내용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싶어 찾아봤더니 원제는 ‘The passion and the cross’였다. 그럼 그렇지… 같은 표현이 찍어내듯 반복되는 것이 조금 의아했고, 예로 드는 이야기야말로 레벨 8,9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살면서 한번씩은 반드시 숙고해야 할 주제를 다뤘다. 뒤로 갈수록 글의 힘이 좀 빠지긴 하는데… 앞부분이 워낙 좋아서 별 흠도 아니었다. 기승전결 모두 완벽할 수는 없지 않나.

고통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삶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은중과 상연 보면서 혼자서 몇 번이나 중얼거린 말)


p.22
"수난이라고 하면 ‘격렬한 고통passionate suffering’이라는 말에서처럼 극심한 고통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틀리지는 않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바로 수난이라는 말이 어떤 것을 적극적으로 행하기보다 받아들이는 수동성, 비활동성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 ’파시오passio‘에서 유래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수난‘에 해당하는 시기는 예수님이 무언가를 행하신 일보다 당신께서 받아들이신 일로 정의되는 시기입니다."

p.26 ~ p.27
"예수님이 선택하신 고뇌의 장소가 동산이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문학적 상징 안에서 동산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동산은 기쁨의 장소, 사랑의 장소, 포도주를 마시는 장소, 달빛 아래 연인들이 만나는 친밀함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동산은 천국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도 동산에 사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p.27 ~ p.28
"동산에서 피땀 흘리신 예수님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분이십니다. 당신과 함께 친밀함과 기쁨을 나누자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이 모든 복음사가가 예수님의 고통을 묘사하면서 고통에 중점을 두지 않은 이유입니다."

p.28
"복음사가들은 괴롭힘, 매질, 결박, 못 박음, 육체적 고통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사가들은 이 모든 과정에서 예수님이 줄곧 혼자셨고, 오해받으셨고, 지지받지 못한 채 외롭게 고립되셨음을 강조합니다. 수난 복음은 사랑하는 자로서 예수님이 느끼시는 고통을 강조합니다. 이는 매우 섬세하고 다정하며, 사랑과 이해심이 넘치고, 따뜻하게 모두를 품어 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오해받고 고립되며 미움받고 잔혹한 죽음에 직면하게 될 때 느끼게 되는 번민입니다."

p.30
"동산에서 예수님이 느끼신 고통은 무엇보다도 인간 존재의 가장 어두운 심연, 즉 오해, 외로움, 고독함, 굴욕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의 심연으로 홀로 들어가는 고통이었습니다. 동산에서의 고통은 냉담함으로 짓밟힌 섬세한 마음, 증오에 짓밟힌 사랑, 오해에 짓밟힌 용서, 지옥에 의해 짓밟힌 천국입니다."

p.32
"예수님은 못 박힘을 두려워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직면할 외로움을, 당신이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이들의 배반을, 그리고 신학자인 길 베일리Gil Bailie의 탁월한 표현처럼, ‘만장일치 속의 유일한 배제’가 될 것을 근심하고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p.33
"동산에서 피땀 흘리시며 하느님께 그 잔을 거두어 달라고 애원하실 때 예수님 앞에 놓인 선택은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느님께 간구하여 목숨을 구할 것인가.’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내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분노하고 비통해하며 용서하지 않은 채 죽을 것인가, 아니면 용서하는 따듯한 마음으로 죽을 것인가.’의 선택이었습니다."

p.35
"암흑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증오에 휩싸여 우리의 사랑을 포기해야 할까요? 이것이 예수님의 수난기에서 가장 실제적이고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기에서 채찍이나 매질이나 못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p.36
"이 구절에서(루카 22,44) ‘고뇌agonia’라는 단어는 단순히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의 크기를 나타내기 위해 쓴 단어가 아닙니다. 당신 고뇌라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뇌라는 단어는 검투사가 시합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행하는 특별한 준비 과정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검투사들은 땀 흘려 몸을 풀면서, 곧 펼쳐질 맹렬한 시합에 대비했습니다. 힘을 모으고,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 힘겹게 땀을 내며 시합을 준비했습니다. 고뇌는 시합에 임하는 검투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p.40
"자기를 살리는 일과 생명을 선택하는 일이 다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공동체를 선택하기 위해 반대를 수용해야 하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쓰라린 고통을 감내해야 하며, 때로는 안전을 선택하기 위해 무서운 추락을 감내해야 하고, 삶을 선택하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p.40 ~ p.41
"목숨을 내어놓거나 진정한 용기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본성은 아닙니다. 힘겨운 시합을 준비하는 검투사처럼 우리도 훈육이 필요합니다.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처럼 우리도 죽기 전에 죽어야 합니다.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고난을 경험해야 합니다."

p.42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를 올리신 후에 당신이 희생당하는 피해자라는 의식 없이, 그저 해야 할 일을 하실 수 있게 되신 것입니다."

p.43
"자유를 바라고, 버거운 의무나 부당한 환경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본인이 청하지 않은 순교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형태의 순교를 결국 마주하게 됩니다. 사랑은 섬세하고 선량한 사람에게 힘든 의무로 다가와, 자신을 희생하라고 요구합니다. 우리의 자유와 기회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은 늘 있습니다."

p.45 ~ p.46
"우리는 대체로 선량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처럼, 우리는 옳은 일을 할 때조차도 종종 원망하는 마음을 품습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는 흥겨운 음악을 들어도 기쁘게 춤추지 못하고 그저 인생의 불공평함에 비통해하며, 사랑의 언저리만 맴돌게 됩니다."

p.51
"겟세마니의 교훈은 우리가 보상을 바라지 않고, 비통함에 굴복하지 않고 정신적 외로움에 땀을 흘릴 때 숭고한 영혼으로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p.56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 암흑 속 고통을 느끼게 하시는 이유는, 하느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이 아니시고, 참신앙도 우리가 상상하는 신앙 너머에 있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p.89
"물론 하느님도 강제하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능력은 강제하는 힘이 아니라, 사랑과 일치를 이루는 힘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은 복음서에서 "엑수시아exousia", 행할 수 있으나 행하지 않는 권능이라고 부르는 것, 즉 나약성 안에서 드러납니다."

p.92
"“예수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전에, 여러분이 십자가에 매달렸다면 과연 좋은 모습으로 보일지 생각해 보십시오.” 다니엘 버리건Daniel Berrigan 신부의 이 말은 예수님과 부활에 대한 신앙이 모욕, 고통, 그리고 죽음에서 우리를 구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신앙이 그런 일을 해 주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의 고통을 면제하시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고통을 면제해 주시지 않습니다."

p.96
"깊고 진실한 신앙을 가진,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받는 사람도 다른 이와 마찬가지로 굴욕과 고통, 죽음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받아들이기 힘든 일입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을 굴욕과 고통, 죽음에서 면제해 주시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고통을 면제해 주시지 않습니다."

p.97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고통을 감내할 힘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우리 삶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다른 모든 이가 겪는 굴욕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똑같이 겪을 것입니다."

p.101
"배척당한 사람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알아뵙고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사람들이 항상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p.103
"카를 라너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사람들이 사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가 없으심을 알았고, 그들 자신의 시기심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들 역시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카를 라너는 말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쉽게 어긋나는 법이 없는데, 이는 심지어 우리가 어떤 도덕적 불감증이나 군중 심리 때문에 집단 폭력에 휩쓸리게 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p.104
"카를 라너는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의식적 자각 너머의 무언가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몰랐던 것은 자신들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이 행동을 하는지 자신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이 얼마나 자신들을 사랑하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무지로 인해 우리와 마찬가지로 진짜 죄에 대해서도 무지해졌습니다."

p.112
"예수님은 우리가 만들어 낸 어떤 지옥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오시어, 얼어붙은 영혼을 녹이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를 낙원의 빛과 평화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긴 문 앞에 그저 무력하게 서 계시지 않습니다."

p.123
"예수님은 죄를 궁극적으로 변화시키시고 그것을 당신 안으로 가져가 되돌려주지 않는 방식으로 죄를 없애셨습니다."

p.125
"우리는 갈등이 있게 마련인 가족, 공동체, 교회, 사회로 들어가 죄를 흡수하되 도로 방출 하지 않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수 필터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미움, 분노, 시기, 옹졸함, 신랄함을 흡수한 후 그것들을 변화시켜 사랑, 자애, 축복, 온화함, 용서로 되돌려줘야 합니다."

p.126
"예수님은 당신이 당한 것을 그대로 전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정적인 힘을 흡수해 지니고 있다가 그것을 변화시켜 다른 것으 로 돌려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미움을 흡수하고 사랑을 돌려주기 위해 견디신 극심한 고통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방법만이 공동체에서 죄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p.128 ~ p.129
"프란치스코회 리처드 로어Richard Rohr 신부의 말처럼, 오랫동안 인간이 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해 피를 흘렸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위해 당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피를 원하신다는 두려움과 잘못된 믿음의 휘장은 찢어졌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께 다가가기 위해 우리의 피를 흘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는 이 사실을 말하기 위해 흘리신 피입니다."

p.140
"언뜻 보면 성모님은 아무것도 하시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말씀도 하시지 않았고, 십자가 처형을 막으시지도 않았으며, 예수님의 무고함이나 판결의 부당함을 주장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성모님은 침묵 속에서 수동적인 태도로 아무것도 하시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심오한 차원에서 성모님은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긴장을 견디며 강인하게 서서, 폭력을 폭력으로 돌려주기를 거부하시며, 심오한 방식으로 저항하고 계셨던 겁니다."

p.141
"성모님은 왜 아무런 행위도 하시지 않고 저항도 하시지 않은 채 그저 침묵만 하셨던 걸까요? 사실 성모님께는 십자가 처형을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처형을 외치고 집행한 사람들의 미움, 신랄함, 시기, 냉정함, 분노를 멈추게 하실 수는 있었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비통한 마음을 비통함으로 되갚아 주거나 다른 이들에게 똑같이 복수하기 를 거부하시고, 부정적인 힘을 속으로 삼키셨습니다."

p.142
"불의에 맞서 외치고 몸을 내던져 싸우면서, 모든 힘을 다해 십자가 죽음을 막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외침과 저항이 더는 도움이 안 될 정도로 어둠이 모든 것을 장악한 상황에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 아래에 굳건히 서서, 어둠의 힘에 동조하기를 거부하고, 분노를 우리 속으로 삼키는 것뿐입니다."

p.144
"때로는 어둠이 모든 것을 지배하여, 우리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질투, 신랄함, 폭력, 죄악과 상처로 가득 찬 세력이 활개 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성모님처럼 십자가 아래에 서 있기를 요청받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막을 수는 없지만 미움과 분노와 신랄함은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수동성과 나약함이 아닌 강인함으로 십자가 아래에 서 있어야 합니다."

p.145
"삶의 고통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비통함 속에 살아야 합니다."

p.146
"십자가를 지고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은 고통 스러운 상황에서도 우리의 고통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p.148
"부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때에 오지 않으며, 부활의 방식도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부합하 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놀라운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p.153
"하느님의 계시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드러납니다. 은총은 항상 놀라운 방식으로 찾아옵니다. 그러한 놀라움은 좋은 의미의 놀라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세상의 모욕을 두려워하시지 않는 하느님은 우리의 굴욕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p.153
"세속적이고 우연한 계기로 신성한 일을 맡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우연한 계기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일에 함께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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