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지구에 아로새겨진 본문

다와다 요코 지음. 정수윤 옮김. 은행나무.
유럽 유학 중 자신이 태어난 나라가 지구에서 없어져 같은 모어(母語)를 쓰는 사람을 찾아 떠나는 Hiruko의 여정과 그의 친구들 이야기이다.
난생 처음으로 떠올려 본 세계(라고 표현해도 될까). 연대의 언어는 타인을 고려하면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언어였다. 숲속 모든 개체를 흔들지만 내려앉지 않는, 수면을 스치지만 잠기지는 않는, 우리 마음을 사로잡지만 더 넓은 세계로 떠미는 언어. 앞으로 다가올 세계가 여기였으면 좋겠어.
무릇 sf라고 하면 우주 정도까지는 뻗어나가야 하는데 고작 지구 안에서 이토록 광활한 이야기라니…
우연히 찾게 된 은행나무 편집자가 만들어놓은 플레이리스트도 너무 좋다.
https://youtu.be/v9J_COmxBW4?si=Y5wP4X7tAkkVvF0U
p.0
"나는 무엇을 하든 언어를 나침반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언어 속에는 나 개인의 머릿속보다 더 많은 지혜가 보존되어 있다. (다와다 요코)"
p.85
""너 불교 신자였어?"
"아니, 나는 언어학자."
"그게 종교였던가."
"그건 아니지만, 언어는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고, 죽음 너머를 보여줘.""
p.103
"냄새뿐만이 아니다. 책을 읽다가 신경 쓰이는 말을 침실로 가지고 들어오면, 깊은 밤 모기처럼 그 말이 날아다녀서 잠을 못 자는 일이 있다."
p.157
"미래에 물고기가 멸종되었을 때, 바다에 사는 식물로부터 어떻게 생선의 기억을 우려낼지가 요리사의 중요한 과제가 되지 않을까. 나는 그것을 '다시 연구'라고 불렀다. 에스키모의 기나긴 문화사를 되돌아보더라도, 국물을 우려 내는 연구에 몰두한 사람은 내가 최초이리라."
p.193 ~ p.194
""우리가 오슬로에 온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나는 나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어. 언어학자인 크누트는 같이 오겠다고 했지. 여기까지는 언어학적인 흥미야. 노라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서 왔어. 하지만 아카슈, 너는 왜 온 거야?"
아카슈는 창피하다는 듯한 얼굴로 가느다랗게 대답했다.
"크누트와 친구가 되려고.""
p.209
"싸워야 할 상대는 우유부단한 나 자신이다."
p.232
"새로운 단어를 배운 뒤 하룻밤 자고 나서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면, 기억이 둘로 쪼개져서, 한참 전에 이미 그 단어와 만난 적이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p.259 ~ p.260
""아버지는 세상을 위하는 일이 아닌 일을 하고 말았다. 너는 로봇을 만들지 마라.""세상을 위하는 일이 아닌 일을 했다니, 무슨 말이야?""PR 센터 로봇, 기억하지?""가쿠? 당연히 기억하지.""가쿠가 아이들에게 한 말, 그건 거짓말이다. 로봇이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거다.""
p.310
""어슴푸레한 공간에 있으면 가까운 사람들과 옅은 어둠 속에서 애매모호한 관계로 지낼 수 있지. 가난이나 나날의 고충을 공유하면서. 하지만 지나치게 밝은 빛에 노출되면, 나는 나, 너는 너로 고립하게 돼. 거울을 들여다보며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지. 빛 속에서 흩어지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매년 어두워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