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모우어 본문

천선란 단편집. 문학동네.
오래 전 베스트극장 시리즈를 보던 때가 생각났다. 한 시간 짜리 드라마를 매주 한 편씩 봤는데, 일주일 동안 간간히 드라마를 떠올리곤 했었다. 시리즈 드라마는 흥미진진하게 펼쳐질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지만 단막극은 어느 한 장면을 돌아보게 했다. 천선란 작가의 이 단편집도 그랬다. 각 단편마다의 어느 특정 장면이, 이야기의 힘이 자꾸 나를 붙들었다. 이미 끝나버린 이야기인데, 장면들이 건전지를 직렬 연결하듯 차곡차곡 쌓이고 이어져 자꾸 힘이 났다, 이 세상을 좀 더 잘 살아보려는 힘이.
p.15
"이전에는 내가 가야 할 길, 먹어야 할 이끼, 잠들 수 있는 어둠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내가 가지 않을 길, 이끼 옆에 핀 꽃. 한낮의 평화가 보인다. 누군가와 이야기 하고 싶다. 끊임없이, 새롭게 보이는 세상에 대해.(‘얼지 않는 호수’ 중)"
p.45 ~ p.46
"다급함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은 의심과 나약함으로 변해 퍼져나갔다. 비밀은 금기다. 감춘다는 건 예측 불가능의 상황을 야기시켰다. 인류의 뇌는 이제 더이상 암흑을 주시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렇게 진화했다. 한때 생존을 위했던 두려움은 어느 순간 탐욕과 뒤섞여 처참하게 변질했고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두려움이 종을 살리는 수단이 아닌 몰살의 수 단이 되자, 진화는 또 한번 종을 살리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선명하지 않은 것은 버려야 한다. 미래를 상상하는 이야기는 모두 없애야 한다.(‘모우어’ 중)"
p.55
"모……하……우......
나는 그냥 알고 싶은 것뿐이야. 의미와 소리가 합쳐진 것이 대체 뭔지.
사시키.
그건 실패한 문명이야. 언어는 심판을 불러왔고, 그들은 종 말을 겪었어. 그러니 알려고 하지 마. 금기야.(‘모우어’ 중)"
p.56 ~ p.57
"언어가 되는 순간 감정은 단순하고 납작해져. 자연과 우리는 분리되고, 우리는 또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규정하고, 구분하려 들겠지. 우리는 한계에 부딪힐 거야.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게 돼. 언어는 쉽게 왜곡되고 무너져. (‘모우어’ 중)"
p.59 ~ p.60
"엄마, 나는 죽은 게 아니라 흐르기 시작한 거야. 내 몸의 시 간이 흐르고 있어. 엄마, 나는 이 시간이 느껴져. 아주 얇아. 거미줄보다 더. 내게는 주름이 생길 거야. 시간이 스치며 생기는 자국이야. (‘모우어’ 중)"
p.88
"지금 이 세계의 시스템을 만든 건 그들이다. 너무 많은 약탈과 분쟁, 만연한 굶주림과 치우친 풍요, 끊임없는 총성과 괴성, 예정된 멸종과 완전한 멸종, 사막과 바다.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서로 뒤섞이지 않는 모래와 물뿐인 행성.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이곳에서 버텨야 한다고, 어떤 방법이든 동원해야 한다고 의견이 모였을 것이고,"
p.89
"모두 시험을 봅시다.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 모두 시험을 보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삶에도 자격과 시험이 필 요한 겁니다. 잘잘못을 따져 무엇하겠습니까? 우리 모두의 잘못입니다. 삶에 대한 인간의 유난한 애착과 불안, 인정 욕구 따위가 지금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거라고요! 이건 특정 누군가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잘못입니다. 그러니 다 함께 시험을 치릅시다. 정교하게 구축된 가상 세계에서 무고한 사람만이 현실로 깨어날 수 있는 겁니다. (중략) 타인을 살해하지 않은 자,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은 자, 타인을 불행하게 하지 않은 자, 타인에게 분쟁을 종용하지 않은 자, 타인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여 물리적 해를 가하지 않은 자··· (중략) 이 모든 것으로부터 무고한 인간만이 가상 세계에서 죽음을 맞이한 후 진정한 현실, 지구라는 천국, 온전한 이데아로 돌아오는 겁니다. (‘너머의 아이들’ 중)"
p.92
"우리는 바라보고 판단하지만, 그들은 판단하고 바라본다. 어른이 될 때, 그렇게 된다."
p.124 ~ p.125
"로비스의 입이 만들어지지 않은 이유는 침묵을 의미하고, 침묵은 위로와 공감을 품고 있다고 무영이 이야기해준 적 있다. 입을 경박스럽게 움직이지 않는 것, 섣불리 유가족의 말을 침범하지 않는 것, 심정을 쉽게 추측하지 않는 것, 거짓으로 공감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의 의미로 로비스의 얼굴에는 입이 없다."
p.130 ~ p.131
"- 그게 마음이 하는 일이니까.
- 마음이 일도 합니까?
- 가끔 하지. 그리고 마음의 일은 몸이 거부할 수가 없지."
p.282
"기억을 놓아줄 수도 있구나.
때가 되면 놓아야 하는 것이구나.
주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고 현장이 정리된 것을 본다. 멀지 않은 곳에서 경찰을 마주친다. 주미는 주머니에 있는 약을 꼭 쥔 채 걸음을 서두른다."
p.295
"딕시는 자신이 그 아이를 궁지에 내몰았다고 믿었다. 코앞에 닥친 암울한 현실에서 숨구멍을 트기 위해 내뱉은 말들이 하나뿐인 딸 레지나를 다른 세계로 밀어넣은 것이다. 자신의 숨이. 살기 위해 내뱉은 그 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