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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캉탱 쥐티옹 글, 그림. 오승일 옮김. 바람북스. 내가 만난 캉탱 쥐티옹의 두 번째 책. ‘코클리코 요양원’에서 일어나는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과 간호사의 이야기이다. 마지막 시간을 생전 알지 못했던 사람들과 낯선 장소에서 보내야 하는 것, 정리하고 돌아보고 마무리하는 마지막 순간마저도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들이 아닌 낯선 이들과 보내야 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대신할 수 없는 것과 대신해도 되는 것.
리베카 솔닛 지음. 아서 래컴 그림. 홍한별 옮김. 반비. 새로이 해석되고 새로이 쓰여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오래도록 리베카 솔닛의 손을 거치길 바라고 또 바란다. p.21 "여러분이 아는 이야기에서는 공주가 백 년 동안 잠을 잤고 공주를 구하러 온 왕자들이 서쪽 탑으로 올라가 공주를 잠에서 깨우고 공주와 결혼해서 주르의 다음 왕이 되려고들 했다고 들었을 거야. 그런데 꼭 그런 건 아냐." p.28 ~ p.29 "마야는 아주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서 진짜 잘 그리게 됐어. 무언가를 아주 아주 잘하게 되면 마치 마법이나 다를 바 없게 돼. (마법은 그냥 일어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보통은 아주 열심히 노력해야 이루어지지. 무언가를 아주 아주 오래 갈고 닦으면 무척 쉬워 보이니까, 사람들이 '마법 같..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루카 1,34-35) #dailyreading 나는 하지 못해도(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그분은 하신다(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묵상과 함께 떠올린 말씀. “안젤로야, 너를 너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교황 요한23세께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일기장에 자주 적으셨다는 이 말을 오늘은 내 마음에 새겨본다. “성심아, 너를 너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림 제2주일에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이’, ‘그분의 길을 곧게 내는 이’로서 마르코 복음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데요, 이번 주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세례자 요한에 대해 묵상을 해보았으면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춥고 메마른 땅 광야에 홀로 살면서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른 채 메뚜기와 들꿀만을 먹고 살 만큼 강단이 센 사람. 아니다 싶은 사람에겐 가차 없이 독화살 같은 말을 쏘아대기도 했고 예수와 버금가는 세력(당대엔 더 큰 무리의 제자를 두었다)을 오랫동안 유지할 만큼 권력형 사람. 예수 출현 이후 스스로 물러나 광야에 머물렀지만 여전히, 끝까지 가장 큰 '목소리' 역할을 한 사람. 초야에 묻혀 사라지는 유..
곰곰이 생각하였다.(28절)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복음을 묵상하다가 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천사의 말 말고, 성모님의 대답(반응)만 따로 떼어서 읽고 또 읽어봤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이런 태도로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꼭 두렵고 떨리는 중대한 선택이 아니더라도 내키지 않아 한마디 말도 하고 싶지 않다거나 한사코 미루고만 싶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무엇인가.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내가 하고 싶은지 아닌지’, ‘지금도 이후도 안전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지’ 염려하다가 그 일이 이루어져야하는 진짜 이유는 ..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마태 9,37-38) 일꾼은 밭주인의 선택이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그렇게 선택되었다. 그러니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혼자 푸념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판단할 일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마태 10,1) 열두 제자가 하는 일은 앞부분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9,35)의 반복이다. 일꾼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마태 15,33) 오늘은 제자들의 이 질문 앞에서 괜히 마음이 꼬이기 시작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아무리 기적을 체험했다 해도 한 번도 빵이 많아지는 기적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결과를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본 적이 있다손 치더라도 매번 기적을 기대할 수가 있단 말이냐. 묻지도 못하는가 말이다... 불평과 딴지가 자꾸만 올라오는 걸 보니, 지금 내가 뭔가에 단단히 걸려 있구나 싶었다. 그래, 서운했다. (난 왜 이리 자주 서운한가...) 지극히 현실적인 이 걱정을, 왜 군중에 대한 연민이 없는 것처럼 오해하는가. 예수님 앞에 우리들 믿음은 다들 고만고만한 것일 텐데, 제자들의 이 말을 단순하게 믿음이 없는 ..
우리 수녀원도 각자 시간되는 때에 만큼은 챙겨보기로 했다. 난 혼자서 봤는데, 희망을 어디에도 둘 수 없는 채로 영화를 본다는 건 정말 너무 힘든 일이었다. 희망 고문이라는 말도 있듯, 소용 없을 희망은 품고 바랄수록 고통만 키웠다. 어떻게 하늘도 돕지 않느냐는 생각이 절로 났지만 도와야 하는 건 사실, 하늘이 아니었다. 약함이라고 생각했던 것, 잠시 물러나는 거라고, 지는 싸움이 분명하니 이건 포기가 아니라 당연한 거라고, 용기가 조금 부족할 뿐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모이고 모여 거대악이 되었다. 악에겐 이런 것들마저도 보태는 힘이 되었다. 내가 나쁘게 하진 않았다, 죄는 아니지 않나, 어떻게 매번 옳을 수 있냐…는 자위적 합리화는 결국 내가 추구하던 정의마저 무너지게 했고 지금까지, 어쩌면 영원에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