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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나해 사순 제3주일에 듣게 되는 복음말씀은 "성전 정화"에 관한 말씀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 사건이 일어났나요?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지난주 복음에서 우린, 남을 변화시킬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변화해야 함을 몸소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우리들의 변모를 이끌기 위함이었지요. 2000년 전엔 이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이 복음을 듣는 우리에게는 무어라 말씀하실까요? 같은 말씀일 겁니다, 다만... 그 성전은 이제 우리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미국 본당에서 일할 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입양된 한 소년이 사춘기가 되어 방황을 심하게 하자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었던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갔습니다. 추운 겨울, 아들을 데리고 산을 넘고 넘어 도착한 곳은 산과 산 사이의 벌판 같은 곳이었는데 일부러 찾으려해도 어려울듯한 그 곳에 도착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습니다. 전쟁 당시 대오와 떨어져 혼자 죽을힘을 다해 산속을 헤매던 군인에게 눈 덮인 산속 어딘가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자신도 길을 잃어 얼어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아기의 울음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얼마 후 아기와 엄마를 발견했습니다. 한 젊은 어머니가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아기를 살리기 위해 눈밭에서 옷을 모두 벗은 채 자..
최진영. 한겨레출판. 몇 겁을 살아온 듯 아이는 단단했다. 겉으론 아이가 부서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럴수록 부서지는 것은 우리요, 우리의 세상. 작가의, 아이의 솔직함이 무시무시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진짜였는데 가짜로 사는 이들이 부르지 못해서 계속 가짜로 산다.
최은영. 문학동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선산을 지탱하는 굽은 나무들의 이야기였다. 그 모든 것을 온 몸에 아로새긴 탓에 부서지고 휘었지만 끝까지 지켜내는 이야기. 그리고 그 휜 나무들의 말. 결국 세상을 지켜내는 말. 결국 세상을 살려내는 태도.p.24 ""앞서 얘기한 학생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죠. 그것도 말을 끊어가면서."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웃음기가 걷힌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p.28 "그녀가 지적할 수 없는 부분에서 은근하게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상대는 이런 지식을 알지 못하리라고 확신하듯 '~거든요'라는 종결어미를 즐겨 썼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p.31 ~ p.32 "그녀는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
이지현. 사계절. 사람들은 볼 수 없지만, 나는 있어요.제목을 읽었음에도 그림책을 넘기며 목화꽃 정원에 사는 사랑스러운 요정들의 이야기인가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책이었다. 하지만 클로즈업된 아이들의 우음기 하나 없는 무표정한 얼굴. 상처투성이 손가락들. 상처에 감긴 붕대와 붕대만큼 낡아가는 아이들의 삶. 날개는 부서지고 떨어지고, 아이들은 점점 줄어들다가 어느새 없다. 분명 없지 않은데 보이지 않으니, 볼 마음이 없으니, 아이들은 없다. 있지만 … 환경을 지키는 노력을 하며 편리하고 값싼 플라스틱 제품들을 멀리하고 면 제품을 골랐다. 하지만 이 수요가 급증하는 질 좋은 면을 빨리, 많이 공급하기 위해 목화를 다치지 않고 딸 수 있는 작고 고운 손을 가진 아이들이, 다쳐가며 웃음을 잃어가며 값싸고 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다가 나병 환자의 조용한, 담담하다 못해 평온하기까지 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낫게 해 달라고 엎드려 소리치며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넘을 수 없었던 경계를 넘어서(율법에서 나병 들린 사람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고 규정했기에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않도록 “부정하다 부정하다”하고 소리를 질러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대담하게 예수님 앞에까지 나아갔으면서도 왜 자신의 원의(저는 정말 낫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원의(스승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인 양 말하는가. 무릎은 꿇긴 했지만 왜 애절하게 매달리거나 간절하게 부르짖지 않나. 왜 이렇게 점잖기만 한가. 나병은 감염된 후 피부 괴사가 일어나..
박서련 장편소설. 한겨레출판.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인 노동운동가 강주룡에 대한 이야기. 체공이란 단어를 반가워하게 된 건 배구를 좋아하면서부터다. 내가 좋아하는 선수를 두고 어떤 해설위원이 신장도 좋은데 체공력까지 좋아서 공중에 오래 머물면서 블로킹을 잡아내는 선수라고 했기 때문이다. 타임 아웃에서 '체공력 좋은 희진이 앞에서 때리면 어떡하냐'는 상대편 감독의 불만 가득한 지시?를 듣고 나서도 이 단어가 좋았다. 그런데 이 단어를 여기서 다시 만났다. ‘공중에(滯) 머물러(空) 있는 여성(女)' 강주룡. 이젠 마냥 반갑기만 한 단어는 아니게 되었지만 늦기 전에 이 책을 만나, 나도 좀 더 버틸 힘을 내어 보자는 결심을 또 한 번 했으니 책에도, 박서련 작가에게도, 을밀대 지붕 위에 ..
이번 주 주일 복음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장면입니다. 그 회당에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오늘은 이 더러운 영이 외친 말을 좀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회당 안, 어쩌면 우리 안에도 '나와는 상관없다'라고 외치는 영이 분명 있습니다. ‘좋은 말이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중요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잘못된 걸 알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필요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안타깝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맞는 말이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믿긴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성당에 다니고 열심히 활동도 하긴 하는데 내가 불편해지는 것은 조금도 양보하지 못해서 내 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