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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오늘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첫 번째 제자들의 부르심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베드로)과 안드레아를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에 제자들은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네,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 형제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어떤 이들은 호수에 어망을 던지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복음만으로는 그들이 예수님을 바라보았다거나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했다는 정보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저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었던 그들을 예수님께서 부르셨고 그들은 곧바로 어망을 쥔 손을 빈 손으로, 그물을 손질하던 시간을 빈 시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제 다른 ..
하미나 지음. 동아시아. 이해받지 못했던 여성 우울증에 관한, 작가의 개인 체험과 자신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용기 있는 이들의 인터뷰로 엮어진 책. 말할 용기를 북돋고, 스스로 용기를 내고, 들어주고, 들려주는 이 다정하고 절박한 행위가 얼마나 우리들을 살게 하는지... 때론 이들이 겪은 우울에 공감하기도 하고, 돌보는 사람의 입장이 되기도 하면서 많이 아파하며 읽었다. 나 역시 설명할 길이 없고 빠져나올 수도 없던 그 짙은 어둠의 시간을 겪었었기 때문이다. 그저 잠시라도 멈춰지기만을 바라며 숨만 겨우 쉬던 때, 내가 시작한 적도 없는 그 시간을 내가 마칠 수도 없었던 , 내 인생에 내가 없던 절멸의 시간을 통과한 것은 끝까지 내 곁을 지켜낸 이들 덕분이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이런 저런 생각 끝에 ..
앤 카슨 지음. 신해경 옮김. 봄날의책 읽기는 자유낙하가 될 수 있다. 푸른 바다의 눈부신 파도처럼 밀려와 각각이 내게 닿았는데 금새 낱낱의 빛깔이 투명하게 부서졌다. 앤 카슨이 발표한 시, 산문, 비평, 강연록 등의 모음인데 너무 읽고 싶은 앤 카슨의 글이었지만 내겐 솔직히, 많이 어려웠다. 한 권으로 묶였다기보다는 각 권을 한 상자에 모아놨다고나 할까. 아니면 각각의 소책자가 글이라기 보다는 글자 혹은 낱말 같았다고나 할까. 굳이 설명이라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도 단박에 이해가 되는 낱말. 통째로 낯설기만한 이국의 낱말. 그저 한 음절의 글자. 알듯 하면서도 어렴풋하기만 한 낱말. 아는 단어이지만 명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낱말... 책의 내용보다는 시인 앤 카슨, 고전학자 앤 카슨, 번역가 앤 카슨의..
오늘은 복음의 한 장면 안에서 변화하는 예수님의 호칭을 좀 살펴보며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 두 사람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들을 본 예수님께서 “무엇을 찾느냐?”하고 물으시니,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에서 ‘라삐’로의 첫 변화입니다. 체험이 있고 나면 우리는 사물을 다르게 볼 줄 아는 또 다른 시선을 얻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체험을 중심으로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달라지곤 하는데요, 예수님에 대한 호칭의 변화는 곧 인간의 영적 성숙이며 그 영적 성숙은 우리 이름의 변화, 존재의 변화(시몬→베드로)를 가져옵니다. 요한의..
트레시 맥밀런 코텀 지음. 김희정 옮김. 위고. 새해 첫 책. 누군가는 사지 않을 여유가 없을 수 있단 말에 정초부터 나는 또 깨어졌다.p.24 "나는 평생 내 발을 고치며 살았다. 한번도 정상적으로 걸어본 적은 없지만 비뚤게 걷지도 않는다." p.34 ~ p.35 "내 발을 고친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서 얻는 결과가 좋지 않을 것 같더라도 상관없이 계속 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나 자신을 고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엄청난 아픔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세상이 나를 보는 시각은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p.183 "왜 우리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지 물었던 것 같다. 위대한 비비언은 진주 귀걸이를 차면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고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날이고, 동방박사들이 별의 인도를 따라 아기 예수를 찾고 경배 드린 것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아울러 이방 민족을 대표하는 동방박사들의 방문으로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빛으로 계시됐음을 나타냅니다. 제대 앞 구유가 동방 박사들로 가득 채워져서 이천년 전의 마굿간 모습으로 완성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마태 2,10-11) 공현 대축일이 되면 제의방 수녀가 잊지 말고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따..
287항 샤를 두 푸코 복자는 하느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봉헌하겠다는 지향에 따라 아프리카 사막 깊은 곳에 버려진 가난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샤를 드 푸코 복자는 모든 인간을 형제로 느끼고 싶은 자신의 열망을 표명하며 벗에게 이렇게 부탁하였습니다. "내가 참으로 이 나라에서 모든 영혼의 형제가 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해 주게나." 궁극적으로 그는 "모든 이의 형제"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과 동일시함으로써 비로소 모든 이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이러한 이상을 불러일으켜 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지난 한 해 동안 을 통독하며 ... 좋았다.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해서 좀 부끄럽긴 하지만 참 좋았다. 그리고 ..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마태 2,16) #dailyreading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목숨들을 수없이 죽여버리는 잔악무도한 권력자의 횡포… 안그래도 답답한 세상인데 뉴스를 본 후라 복음을 읽는 내내 마음이 너무 착잡했다. 무고한 이들이 죽음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그때 우리는 가까스로 살아 남은 아기를 탓할 것이 아니라, 권력자가 주춤할 수 있도록 내 자세를 다잡아야 한다. 오늘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이다. 이들을 기억하며 식사 후에 서둘러 올라와 내 빨래가 없는 공동 빨래를 개키고 다림질을 했다. 내 빨래가 없으니 나는 오늘 빨래를 널지 않아도, 개키지 않아도 되겠지 하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