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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존 버거 글. 셀축 데미렐 그림. 신해경 옮김. 열화당. 를 읽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이 책을 먼저 읽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경험마저도 내겐 ‘시간’의 경험 같았다. 내가 뜻한대로 흐르진 않지만 시간은 자신의 순서대로 흐르고, 오고 가는 것들을 맞이하고 보내며 나도 시간 곁에서-온전히 안도 아니고 온잔히 밖도 아닌 곳에서- 시간의 주인이신 분께로 다가간다. p.40 "오래 품은 두려움은 의심이 된다." p.54 "어쨌든 세상에는 시간, 또는 특정한 시간을 거역하는 때들이 있다." p.70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시간이 없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쫓기며, 각자의 삶을 쫓는다."
안젤름 그륀. 김선태 옮김. 성서와함께 몰라서 못하나 싶어서 시큰둥하게 시작했지만 읽어 본(20년 전에 ㅎㅎㅎ) 책인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지하게 읽고 싶었고, 뒤로 갈수록 이 책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졌다. 모르지도 않았지만 제대로 알았다고도 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 잘 대하기’. 이제 동생 수녀님한테 넘겨줘야지. p.20 "과거에 돌보지 못했던 공격성은 자신을 향한다. 자기처벌은 종종 우울증이나 소화 장애, 두통, 배통(背痛) 등의 정신과 신체상의 증세로 나타난다." p.20 "돌보지 않은 채 방치해 둔 상처는 계속 옮겨가면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도록 우리를 강요한다." p.23 "아이를 때리는 엄격한 교육만이 아이에게 공격성을 심어주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쉬기 위하여 아이가 항상 제멋..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루카 19,21) 오늘은 14절(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에 걸려서 묵상이 잘 넘어가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무단히 미워하는 것이 오늘따라 견디기 어려웠던 것. 내가 다 속이 상해서 감정만 끓이다가 좀 가라앉고 나니 곧 애초 그 종의 마음 그릇이 그 정도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받을 품삯이 아닌, 주인으로부터 거저 받은 돈을 쥐고서도 ‘거저 주시는 분’의 혜량은 깨닫지 못하는 정도의 그릇 말이다. 열매 맺은 나무가 영글은 열매를 내놓지 않으려..
일란 파페 지음. 유강은 옮김. 열린책들. 출신상 이스라엘 사회의 주류 유대인이라 할 수 있는 일란 파페가 이스라엘과 아랍의 갈등, 이스라엘의 원죄 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이스라엘의 건국 전후로 벌어진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학살과 추방에 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쓴 책들 중 하나. 나치 폭압으로 뼈아픈 시련을 겪은 유대인들이 저지른 '종족 청소'에 대한 유대인의 고백이자 고발이다. 역사적 전체의 흐름보다는 1948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탄생과 종족청소의 참혹한 현실을 조목조목 알려준다. 이미 절판된 책이라(너무 안타깝다)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2.28기념 도서관까지 가서 빌렸는데 읽는 것이 솔직히 쉽지 않았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인데 내내 장소와 날짜, 숫자만 바뀌고 파괴, 유린, 학살, 강간, ..
정세랑 장편소설. 문학동네. 마침표까지도 나무랄 데가 없는 이야기. 역시 정세랑. 흥미진진하고 너무 재미진데(사투리 쓰고 싶어서 ㅎㅎㅎ) 치밀하고 따뜻한, 게다가 정중하기까지 한 이 이야기가 서둘러 끝나버리면 나는 어쩌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계절마다 경주에 가 다음 이야기를 건져오고 싶다는 작가의 말을 읽고 나서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번쩍! 제발요!!! 밑줄 그어 남긴 문장들을 다시 읽었다. 나는 정세랑 작가의 힘이 바로 이런 문장들이라 여긴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 잘 드러나지 않아도 소설 전체를 받치는 힘이 이런 문장에서 나오고 나는 또 그의 책에서 이런 문장을 보물 찾듯 발견하는 게 너무 좋다. p.33 "밤새 갑판을 살폈어야 할 불침번은 잔잔한 파도소리에 그만 잠들어버렸노라고 무릎을 꿇었다..
황정은 연작소설. 창비. p.266 서수경은 내 머리에 손을 올리며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아니 나는 속상하다고 진짜 속상해서 그 사람들을 일일이 방문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고, 한 사람이 말하는 상식이란 그의 생각하는 면보다는 그가 생각하지 않는 면을 더 자주 보여주며, 그의 생각하지 않는 면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비교적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당신은 방금 너무 적나라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그렇지. 적나라赤裸裸.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열린책들. 릴라와 레누와 또 다른 이들과 함께, 나역시 떠났지만 매여 있던 순간과 머물렀지만 헤매던 순간을 떠올리자니 서글프기도 했고 인생의 신랄함에 가련하기도 했다. 이들은 어디까지 가야하는 걸까.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미스 지음. 장영재, 김재경 옮김. 웨일북. 타인을 인간 이하로 보는 비인간화에 대한 거의 모든 역사를 다룬 책. '자기도취적 집단 차별과 잔혹한 폭력성이 나타나는 심리학적, 사회학적, 인류학적 설명을 다각도로 조명하며 하나의 원인에 초점을 둔 단편적 주장이 아니라 거대한 진화사적 관점에서 포괄적 설명을 시도'(감수의 글)한 책이다. 살면서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사람이 사람을 저렇게 대하나 싶은 일이 얼마나 많나. 개인에서부터 소규모 집단, 국가나 민족으로까지 이 무자비한 비인간화는 상대를 거침 없이 무너뜨리고 잡아 뜯고 짓밟는다. 책을 통해 답답함도 해소하고 무엇보다 그 연유를 알고 싶었지만, 내가 얻은 답은 명확한 연유가 아니라 비인간화는 거의 태초부터 인간의 역사와 함께 했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