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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우리가 건너간 시간 본문

하루하루 부르심따라

우리가 건너간 시간

하나 뿐인 마음 2014. 6. 19. 03:43


밤 비행기를 타고 새벽에 보스톤 로간 공항에 내리니 6시도 채 안된 시간이었습니다. 마중 나와주신 형제님의 차를 타고 보스톤 가르멜로 향했지요. 입회 전 얼굴 스친 인연, 막 떠난 사람과 막 도착한 사람의 인연이지요, 우리는. 


약속한 사람에게도, 같은 길을 걷는 수도자에게도 새벽 가르멜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에야 아네스 수녀님이 문을 열고 나와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우리 시간에 맞춰 문이 열린 것이 아니라 수도원 개인 기도가 끝난 후 그러니까, 그 안의 시간에 맞춰 문이 열렸지요. 잠시 봉쇄 수도원과 활동 수도원의 차이가 문이 열리는 시간의 기준인가 싶었습니다. 


고즈넉한 동네에 자리잡은 수도원의 문은 세상과의 사이를 무게로 가르고 있었습니다. 철창 같은 문 사이로 수도원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대문이었습니다. 쉽게 보인다 해서 쉽게 열리지는 않는 문이었지요. 게다가 대문 머리에 쓰여진 "Pray Always"라는 말이 던지는 무게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반 평신도이든 사제나 수도자이든 "Pray Always"라는 말 앞에서 맘 편한 사람이 과연 몇이겠습니까. 대문의 육중함 만큼이나 무거운 질문이지요.


우린 거의 15년 만에 만났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정원을 거닐고 함께 미사도 드렸습니다. 그리고 피정집으로 오기 전 함께 미술관도 가고 밥도 먹었습니다. 오랜 만에 밖으로 나온 수녀님과 오랜 만에 세상을 떠나 안으로 들어갈 우리들은 각자의 길을 가면서 이렇게 스쳐 만났습니다. 


피정 집에 도착하니 처음 만나는 서울 수녀님들조차 생소하지 않고 반갑기만 했습니다. 농담처럼 "나도 사수동으로 들어갔어."하셨지요. 그러고보니 우린 같은 문을 통과했는데 각자가 서 있는 곳은 이렇게 달랐습니다. 우리가 같은 문을 열었다는 것, 지금 우리가 같은 곳에 서 있는 것 모두 당신이 우리를 부르고 이끄셨기 때문이란 걸 압니다.  


우리들을 보면서 당신의 부르심을 생각합니다. 우린 불리웠고 응답했고, 조금씩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종내엔 다시 같은 자리에서 만나겠지요. 그 이후론 영원함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요. 서둘지 않고 가고 싶습니다. 후회가 없을 수야 없겠지만, 즐기며 가되 너무 많은 후회를 남기진 않을 정도로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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