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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마태 20,1-16 빈 공간을 보시는 분 (가해 연중 제25주일 레지오 훈화) 본문

마태오의 우물/마태오 20장

마태 20,1-16 빈 공간을 보시는 분 (가해 연중 제25주일 레지오 훈화)

하나 뿐인 마음 2023. 9. 12. 19:36

 

<이도다원04> painted by 허연경(Her Youn Kyong)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이렇게 마음이 묵직하게 아파온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이들처럼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일을 할 수가 없어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서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싶어서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아니 자본주의의 기준에서 보면 일한만큼 돈을 받는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할 기회가 공정하지 못했다면,  책임져야할 가족 등 반드시 필요한 돈의 쓰임새가 다르다면,  사람마다 느끼는 돈의 무게가 삶을 좌우할 만큼 차이가 난다면... 사실 이런 식의 질문들은 끝이 없다는 걸 은연중에 알고 있지만 내 안에서 들리는 질문은 좀처럼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굳이 이사야 예언자의 이 전언(傳言)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살아오면서 우린 수많은 실패 끝에서 이 사실을 받아들여 왔습니다. 나의 생각과 번번이 어긋나는 그분의 뜻. 이 복음 안에서도 인간이 스스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삯과 예수님이 책정하시는 삯은 이렇게 다릅니다. 삯을 정하는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긴 합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정당한 삯’(4절), 한 데나리온은 daily wage 즉 daily bread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돈은 일한 만큼의 대가가 아니라 그 사람의 필요에 대한 응답입니다. 무엇을 했나 보시는 게 아니라, 무엇이 필요한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을 사러 집을 나선 주인이 아니라 사람을 사러, ‘사람을 낚으러’ 집을 나서는 주인이십니다. 하루가 저물어 가는 저녁에 다시 집을 나서는 건, 포도밭 일거리가 급해서가 아니라 일거리가 필요한 사람을 찾는 것이 급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주라고 이르는 것도 목마른 사람에게 먼저 물 잔을 건네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생명이 오가는 급한 환자를 먼저 치료하는 의사, 열일 제쳐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 찾아 산을 헤맬 각오를 하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자기들과 늦게 온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한다고 투덜거리는 이들과 뙤약볕 아래에서 매분 매초마다 자존심을 꺾으며 버텨야 했던 이들을 그 주인은 나란히 두지 않습니다. 매사가 이런 식이라면 누군들 열심하고 싶겠는가 하며 부당하다고 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게 나였다면’ 어땠을까요. 배고픔보다 더 쓰라린 자존심을 견디며 한낮의 태양보다 수치심이 자신을 더 뜨겁게 달구는 상황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면 말입니다.

이 복음은 옳고 그름의 정의에 대한 개념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의 자리에 ‘나’를 넣어볼 것. ‘나’를 중심으로 논리를 펴나가지 말고 ‘나’의 자리에 ‘너’를 세워두고 ‘내’가 피력했던 논리를 다시 한 번 펼쳐볼 것. 사실 그들이 부당하게 대우 받은 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망각한 것부터가 어쩌면 부당한 일인지도 모르고요.

‘비운만큼 채울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신앙인의 눈으로 보자면, 내가 비운 만큼 그분께서 채워주실 수 있다는 뜻이 되겠지요. 내 그릇이 담긴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주님이 주시는 것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은 줄어듭니다. 양 손에 가득 쥐고서는 다른 것을 절대 쥘 수 없는 법이니까요.

필요한 것을 보시는 분. 주님은 채워진 것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미처 채우지 못한, 아니 스스로는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을 보시는 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뒤늦게 들었습니다. 사실 뒤돌아보면, 그분은 늘 나의 넉넉함보다 나의 부족함을 염려해주셨기 때문이지요. 내가 그분의 은총을 받을 만큼 잘나서가 아니라 내가 그분의 은총이 필요할 만큼 부족했기 때문이고요.

복음을 묵상을 마무리하면서 궁금했었습니다, 품삯을 받아들고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표정이... 나는 과연 이들 중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정당한 삯은 생명일 때도 있고 은총일 때도 있고 성체일 때도 있는데 우리는 그때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부질 없는 질문마다 들리는 예수님의 응답은 이렇습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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