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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 조현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사랑하는 형을 떠나보내고 더 이상 형을 볼 수 없었던 패트릭은 수많은 예술가들이, 떠나보내는 대신 사로잡아버린 순간들 속으로 숨었다.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 마주하는 아름다운 작품들. 그 사이에서 다시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그는 숨어든 그곳에서 뒤돌아 나온다, 세상 속으로. 내겐 이 책이 그가 관조(觀照)한 사람들 이야기 같았는데, 세상에서 조금 물러나 여러 사람들을 만난 후 마음이 조금씩 아물었던 게 아닐까.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굳이 구분짓고 나눌 필요는 없겠지만 이 옷을 입고 이쯤 살다보니 내가 생각했던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잘하는 것’이 어쩌면 진짜 좋아하는 것이나 정말 잘하는 것과 다를 수도 있음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다. 첫 깨달음은 초등학교 5학년 글짓대 대회였다. 전교생이 학년별로 글짓기 대회를 했는데 친한 친구와 나는 편지쓰기 대회에 함께 나가고 싶었다. 당시엔 펜팔 문화가 있기도 했고, 평소 예쁜 편지지를 잔뜩 모아두었다가 방학이 되면 그리운(애써 그리워하며?)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는 일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성당 친구나 동네 친구가 아닌 이상 한 달이 넘는 방학 동안 친구를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편지라도 써야지만 뭔가 친구의 도리를 다하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심지어..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다산책방. 눈부셨다, 소설 속 언어가, 슬픔조차 몰랐던 아이의 성장이, 슬픔을 품은 어른의 속깊은 사랑이. 절제된 감정이, 삼킨 말들이 제대로 보게 하고 제대로 말하게 하고 분명하게 느끼게 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이 문장 때문에 너무 많이 울었다. p.27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 “넌 너무 어려서 아직 모를 뿐이야.”" p.30 "나는 아까 이 집에 도착했을 때처럼 집시 아이 같은 내가 아니라, 지금처럼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뒤에서 아주머니가 지키고 서 있는 내가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다음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이번 주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마르코 복음에는 마태오 복음과 달리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표현이 분명하게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복음을 선포하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그렇다면 ‘복음 선포’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우리자신? 이웃?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음 선포의 대상은 사람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피조물은 무엇일까요? 쉽게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 해, 달, 별, 나무, 동물, 강, 돌... 이 세상 모든 것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 피조물들은 단순한 사물도,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도, 사회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데 필요불가결한 자원..
이재근 지음. 바오로딸. 오랜만에 맘편하게 웃으며 읽은 책. 신부님 글을 읽으며 근래의 내 삶을 다시 돌아봤는데, '그래, 이것도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하던 내게 가벼운 하이파이브 같았던 책이다. 언니 수녀님이 수술 후 회복을 위해 잠시 분원을 떠나고 우리 수녀원에는 비상이 걸렸다. 비상이라는 단어가 호들갑 같기도 하지만, 덩치 큰 분원의 집안일과 본당의 빈 자리는 생각보다 컸고, 내 기도와 각오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지쳐갔다. 수녀원과 성당 빈자리를 오가며 살피다보니 두 달 가까이 책을 한 줄도 읽지 못했다. 가벼운 동화책도 읽을 여유가 없었으니 내 인생 5세 이후로 처음 맞는 엄청난 독서 공백기였다. 평소에는 바빠서 책을 못 읽더라도 혹시나 쪽짬이 생기면 읽으려고 늘 들고는 다녔는데 근래는 아예 그..
그리스도교의 성경에는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가 네 가지 있다고 합니다. 이성간의 사랑을 에로스, 가족간의 사랑을 스톨게, 우정이나 사회적 사랑을 필리아,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아가페라고 합니다. 이 중 아가페는 그리스도교 이전의 구약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리스 문화권에도 발견되지 않는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개념입니다. 에로스는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스스로 충족되지 못하고 결핍되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즉 필요와 욕망, 결핍과 갈망의 사랑인 에로스는 스스로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욕구입니다. 이런 이유로 타락한 신화적 편견이나 오해 없이 신적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성경 저자들은 '아가페'라는 말을 선택하여 쓰게 되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 아가페 사랑은 일차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아가페 자체..
메리 올리버. 민승남 옮김. 마음산책. 천천히 걸으며 세상을 음미하다가여전히 천천히 우리를 스쳐 영원의 길로 간다. 진실로, 우리는 너무도 불가사의하여 도무지 풀 수가 없는 수수께끼들과 더불어 살지.어떻게 풀은 어린양들 입속에서 자양분이 될 수 있는지.우리는 위로 오르기를 꿈꾸는데어떻게 강들과 돌들은 영원히 중력에 충실한지.어떻게 두 손이 맞닿으면 그 유대가 절대로 깨지지 않는지.어떻게 사람들은 기쁨을 얻기 위해, 혹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시의 위안을 찾아오는지.자신이 답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이들과는 늘 거리를 두고 싶어."봐!"라고 말하며 경이의 웃음 터뜨리고 고개 숙이는 사람들, 늘 그런 이들과 어울리고 싶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언젠가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릴까 생각한(사실 종종 생각한다) 적이 있다. 누군가가 ‘그렇다면 나는 길도 진리도 생명도 될 수 없다는 말인가요? 나 스스로는 그 어떤 경지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인가요?’하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있다, 없다는 짧고도 명확한 답은 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내 안에서 어딘가에 도달하려 애쓸 때마다 내가 도달한 곳은 ‘나 자신’이었다. 매번 나를 내려놓지 않고서는 나를 벗어나지도, 다른 곳에 다다를 수도 없었다. 나를 찾으려 애쓸수록 내가 얻는 것은 그저 나 하나일 뿐(이마저도 내가 되고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