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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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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ta contemplativa

부켄베리아와 할머니

하나 뿐인 마음 2015. 4. 17. 01:37



피정날 아침, 할머니 수녀님과 브랜든 성당에서 미사를 드린 후 잠시 성당을 둘러보는데 교육관 벽에 부켄베리아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심은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무성하지 않은 부켄베리아가 낯설기도 하고, 가지에 비해 빠알갛게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차에 올랐다. 


차에 타자마자 할머니는 담을 이루고 있는 무성한 녹색잎을 보시더니 "여기도 부켄베리아네."하며 반가워하셨다. 피는 꽃을 보고서야 겨우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추는 나로서는 여태 그 나무가 부켄베리아인지 알 리가 없었다. "꽃이 없어서 전 그동안 이 나무가 부켄베리아인지 몰랐어요."하니, 조금 서운한 목소리로 "없긴 왜 없어. 자세히 봐, 많지는 않지만 꽃이 피어 있어."하시는 게 아닌가.


그런가보다 하면서 차를 빼고 출발하는데 할머니께서 다시 한 말씀 덧붙이셨다. "젊은 나무는 예쁘고 새빨간 꽃을 많이 피우고, 늙은 나무는 이제 꽃이 별로 없구나. 사람하고 똑같네."


나만의 생각인가, 왠지 씁쓸함이 묻어나는 이 말씀에 "에이, 제 방 옆의 부켄베리아는 오래된 나무이지만 사시사철 얼마나 한결같이 무성하게 예쁜 꽃을 피우는데요. 새들도 다람쥐도 수시로 찾아와 창밖이 시끄러울 지경이예요."하고 손사래까지 치며 말했지만 수녀님은 내 말이 사실보다는 위로를 담고 있다는 걸 아시는 듯 했다.


사람하고 똑같네...


할머니 수녀님은 일반론적으로 하신 말씀일지 몰라도 돌아오는 내내 '꽃으로만 나무를 알아보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열매만으로 평가되는 세상을 개탄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열매와 꽃으로만 나무를, 사람을 알아보며 살았던 건 아닌지. 나무의 시작은 어미 나무요, 작은 씨앗이요, 흙에 파묻힌 뿌리임을 종종 잊고서 살아가는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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