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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선언 소식을 접하며 본회퍼를 기억하다 본문

vita contemplativa

시국선언 소식을 접하며 본회퍼를 기억하다

하나 뿐인 마음 2013. 8. 16. 02:01


나는 내세울 게 있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거창한 포부 같은 걸 품고 사는 사람도 아니지멀리 고국, 그것도 고향에서 들려오는 대구대교구 사제 수도자 506인의 시국선언 소식에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서 또 자문해봤다. 나는 왜 이 삶을 살고 있는가.

 

개인적으로 성소의 이유를 물어오는 이들에게 나의 대답은 언제나 '부르셔서'이지만, 부르셨다는 건 살면서 깨쳐온 바이고 더 원초적이고 이상적인 동기는 입회 몇년 전부터 기억에서 떠나지 않던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 나도 사랑하며 살고 싶어서"라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 때문이다. 멋쩍은 표현은 늘 내게 어려운 숙제지만, 그래, 사랑하고 싶어서 이 삶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면서 번번이 사랑에 실패하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사랑하고자 한다. 사랑.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잣대로 재어보면 가감없이 나 자신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죽을만치 아플 때도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지금도 나에게 나 자신을, 내가 사는 세상을 '재어'보라고 재촉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부르시는 것은 와서 죽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본 회퍼)


새 소임을 시작한지 몇달 지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여기 왜 왔는가?" 나는 그동안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으며 내 삶을 살아 왔다. "그리스도는 나를 왜 이곳으로, 이 삶으로 부르셨는가?" 본 회퍼는 결국 그리스도의 부르심의 이유,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물론 이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나 자아의 죽음, 이기심의 포기 등을 포함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의 봉헌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작은 존재에 불과한 나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인 '죽음'을 내 삶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것인가. 


개신교 신학자 본 회퍼는 히틀러 집권에 대항하다가 나치의 감시를 받게 되고 염려가 된 지인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지만, 결국 조국 독일의 시련을 함께 겪기 위해 안전한 미국을 떠나 스스로 나치 치하의 독일로 되돌아간다. 그곳에서 나치에 대항하는 투쟁을 하다 끝내 서른 아홉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나 내가 매를 맞는 것, 또 내가 죽는 것까지도, 이런 것들은 어쩌면 나에게는 그렇게 심한 고통이 아니다. 나를 참으로 고통스럽게 하고 괴롭히게 하는 것들은 내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에 감옥밖 세상이 너무나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사랑이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는 결심했다. "제 정신을 잃은 운전자가 폭주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있으니" 그를 운전석에서 끌어 내리려고 마음 먹었다. 운전자의 폭주에 다치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당장 필요한 것은 '죽음을 무릅쓰고' 폭주하는 자동차에 뛰어들어 제정신이 아닌 그 운전자를 '멈추게 하는 것'.


다치고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염려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죽음의 질주를 '멈추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소신을 가진 수많은 이들의 시국선언을 비롯한 대구대교구 사제 수도자들의 시국선언 역시 '죽음을 무릅쓰고' 폭력의 질주를 '멈추게'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사제 수도자들의 기도이고 사랑이며 부르심이 아니겠는가. 죽음까지도 무릅쓸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해 죽음을 각오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마음 먹은 사제 수도자들의 '특권' 아니겠는가.

 

본 회퍼의 말을 인용하긴 했지만, 본 회퍼처럼 운전자를 끌어내리거나 없애버리겠다는 말은 아니다. 멈추게 하겠다는 말이다. 더이상 무고한 희생이, 어이없는 죽음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은 그 질주를 멈추게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병폐가 그렇듯 다치는 사람들을 고쳐주며 이득을 보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부서진 자동차나 망가진 건물과 도로를 복구하며 이득을 보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눈 앞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자신의 이득에 눈 멀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멈춰야 한다. 더구나 그 운전자가 온전한 정신이 아니라면, 술을 마셨거나 운전을 할 수 없는 심각한 내외적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위해서도 이 질주는 멈추어져야 한다. 달리는 자동차에 뛰어들어서라도 누군가는 멈추게 해야 한다.

 

"순간의 쾌락에 동요되지 말고, 정의를 단호히 행하고, 가능성에서 흔들리지 말고, 현실적인 것을 담대히 붙잡으라.

사고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행위에만 자유가 존재한다. 두려워 주저하지 말고 인생의 폭풍우 속으로 나아가라.

하느님의 계명과 너의 신앙이 너를 따르리니, 자유는 그대의 영혼을 환호하며 맞아주리라."


예비신자들에게 교리가 끝나갈 무렵 항상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열 명이서 사과 열 개를 나누어 가지면 각각 하나의 사과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열 명이서 촛불을 나누어 가지면 세상은 더 밝아지고 따뜻해진다. 그리고 그 불을 다시 모으면 더 큰 불이 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촛불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 촛불의 삶은 사랑의 삶이며 바로 그리스도가 사셨던 삶이다. 잊지 말자. 촛불은 언제나 스스로 먼저 타올라야 남에게 전해줄 수 있음을. 내 삶을 밝히지 않고는 나누어 줄 수 없음을.


시국 선언 소식을 접하며 본회퍼를 떠올리다 몇 자 적어 보았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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