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食性 人間

나는 가장 슬픈 순간에 사랑을 생각한다

하나 뿐인 마음 2024. 8. 10. 13:43

 

새벽부터 지음. 워터베어프레스.
 
꿈이랄 것까진 없지만, 좀 일찍 물러나 동생 수녀님들 밥 잘 챙겨주고 소리없이 구석구석 집안일 살피고 쿨하게 밑반찬 만들어두는 할머니 수녀님으로 늙고 싶다. 지금도 유효한 바람이지만 살수록 까마득해지는 바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람이 하나 더 생겼다.  좀더 늦어지더라도 본원에 들어가게 되면 문지기 수녀님이 되고 싶었다. 몇년 전 30일 재피정을 했을 때 규칙서 66장을 묵상하면서(https://singthelord.tistory.com/2594) 생긴 바람이다. 문지기를 하며 책을 마음껏 읽으려는 마음은 가려지지 않는 내 욕구이기도 하지만...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내 바람을 다시 떠올렸다. 삶이란 게 본래 남과 비교할 일도 아니거니와 비교해서도 안 될 일이지만 선생님 글 덕에 내 바람을 더 소중하게 간직하며 '기다리게' 되었다. 읽기 시작할 무렵 트위터에서 썼었는데, 트위터에서는 선생님의 유머를 몰랐지만 책을 펴자마자 기분이 ‘펴졌다’. 선생님의 유머가 재밌어서 기분이 펴진 것도 있지만, 그냥 나오는 우스개소리가 아니라 공들여 품고 간직하신 거구나 싶어서다. 음악을 찾아 듣듯, 책을 골라 들듯, 숨을 애써 고르듯 말이다. 가장 슬픈 순간에 사랑을 생각하듯이... 머리를 풀고 두 다리를 쭈욱 뻗어 곧고 편하게 눕듯, 그렇게 마음이 펴졌다.
 
솔직한 글이 주는 위로가 있다. 트워터에서 만난 많은 친구들의 글이 내겐 그렇고, 이 티스토리에 내가 적은 허접한 글이 가끔 나를 위로한다.
무엇보다 이 책, 선생님의 글에서 받은 위로가 적지 않다. 


p.23
"경비원에게 겨울은 눈만 내리지 않으면 가장 좋은 계절이다. 뽑아야 할 풀도, 쓸어야 할 낙엽도 없는 겨울이라 책을 읽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주어진다. 오늘도 시간을 아껴 책을 읽었다. 경비원의 독서라니 어울리지 않지만, 단순한 업무가 독서에 큰 도움이 된다. 움직이고 듣고 읽었다."

p.23
"경비원을 하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난다. 오늘은 음식물 쓰레기통에 깨진 그릇 두 뭉치와 일반 쓰레기를 버린 것을 봤다. 꺼내서 처리했다.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경비원은 잘못된 것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사람이니 잘잘못을 판단하지 않고 열심히 치우기로 했다. 마음이 편해졌다."

p.32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더 많은 것이 삶이다."

p.66
"새벽에 깨어 책을 읽었다. 아내는 일하다 마음 다치면 그만 두라고 한다. 하지만 언제는 마음을 다치지 않아서 직장을 35년 다녔던가. 나를 기다리는 천국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마음 편하게 살자고 결정하면 이 사회에서 내 역할이 끝난다.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면 삶이 아니다."

p.143
"단순한 노동에는 중독성이 있다. 주변을 정리하고 빗자루로 쓰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어떤 위안을 받는다. 60대가 되면 삶의 단순함이 행복을 안겨줄 거라고 기대했지만 살아 있어서 삶은 늘 무겁다. 오늘도 흐트러질 수 없는 삶을 마주하며 경비실에서 아침을 기다린다."

p.151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등록되었다는 카드가 도착했다. 60대는 일하기에 충분한 나이지만 나이의 의미를 생각해야 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나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시간을 바라보고 나를 받아들이며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만하면 됐다."

p.190
"가난하고 삶이 힘겨울 때 내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확신이었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길을 걸어야만 아름다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가난하다고 책을 사지 않으면 더 가난해진다는 것을. 삶이 힘겨워 음악을 사치라고 여기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다는 것을 늘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