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우물/요한 6장

요한 6,1-15 드릴 것이 없음을 알았을 때 봉헌이 시작된다 (나해 연중 제17주일 레지오 훈화)

하나 뿐인 마음 2024. 7. 28. 10:03

  이번 주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사화인데. 특별히 제자들의 '동문서답'을 살펴볼까 합니다.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필립보는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안드레아는 "여기 보리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합니다.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은 제자는 없습니다. 그저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생각하고, 가진 것의 빈약함에 절망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물으시는 말을 듣기는 해도 내 생각으로 꽉 차 있어서 동문서답을 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는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일용할 양식을 아버지로부터 구할 수 있음을, 아니 아버지에게서만 구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보잘것없음에 스스로 실망합니다. 예수님이 듣고 싶으셨던 것은 아마 "하느님 아버지" 이 한 마디뿐이지 않았을까요?
 
  수녀원에서 4년 정도를 살고 나서 수련기가 끝나갈 무렵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 처음으로 서원을 준비합니다. 서원 피정을 하면서 깨달았던 건 나의 온전한 봉헌이 아니라 "드릴 것이 하나도 없음에 대한 쓰디쓴 자각"이었습니다. 드릴 것이 없음을 알았을 때 봉헌이 시작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첫서원을 앞둔 저는,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봉헌을 완성해 보겠다는 욕심을 접고 두 손을 비워둔 채 아버지께 온전히 기대는 것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었습니다. 더불어 드릴 것이 있어야 봉헌할 수 있다는 생각, 나아가 ‘할 수 없다’ ‘자격이 없다’는 말 역시 겸손보다는(하느님의 판단에 맡기지 못하는) 오만, 교만에 가까운 ‘내 판단’, ‘자기 확신’임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봉헌으로 많은 것을 드리고 싶어 하지만, 혹은 내가 옳다고 여기는 봉헌을 드리고 싶어하지만, 예수님은 그저 하나, 우리 자신만을 바라십니다. (예로니모 성인 이야기)
 
  오늘도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물어오십니다. "너희의 일용할 양식을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 이 질문에 "모든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옵니다."라는 대답을 드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당장 대답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 판단에 갇혀 동문서답은 하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