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食性 人間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하나 뿐인 마음 2024. 2. 18. 22:54

최은영. 문학동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선산을 지탱하는 굽은 나무들의 이야기였다. 그 모든 것을 온 몸에 아로새긴 탓에 부서지고 휘었지만 끝까지 지켜내는 이야기.

그리고 그 휜 나무들의 말. 결국 세상을 지켜내는 말. 결국 세상을 살려내는 태도.


p.24

""앞서 얘기한 학생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죠. 그것도 말을 끊어가면서."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웃음기가 걷힌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p.28
"그녀가 지적할 수 없는 부분에서 은근하게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상대는 이런 지식을 알지 못하리라고 확신하듯 '~거든요'라는 종결어미를 즐겨 썼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p.31 ~ p.32
"그녀는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이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p.33
"나는 아직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p.40
""희원씨가 앞으로 겪을 일들을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으 면 좋겠어서."
그녀의 말이 내게는 자격지심이나 피해의식을 갖지 말라는 충고로 들렸다. 그런 식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고 미성숙한 것인지 왜 모르느냐는 채근으로 들렸다. 나는 내가 그런 어린애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그녀의 말에 그다지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듯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중)

p.70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희영은 이야기했다. 그 구호보다도, 주변에서 옅게 퍼지던 웃음소리가 더 기억에 남는다고. 강간이라는 말이 집회에 활기를 주던 그 순간을 잊을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당신은 얼음장 같은 희영의 손을 잡고 인파를 빠져나왔다."
(‘몫’ 중에서)

p.75
"글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 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몫’ 중에서)

p.79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몫’ 중에서)

p.81
"초년 기자 시절, 취재를 위해 갔던 집회에서 사람들이 〈Fucking USA〉를 부를 때 당신은 희영에게 말하고 싶었다.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던 그 노랫소리에 귀를 막고 싶었다고, 그러나 그런 생각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어 벌을 받듯 그곳에 서서 노래를 듣고 있었다고."
(‘몫’ 중에서)

p.115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