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말아라. (RB 머리말 48)

하나 뿐인 마음 2020. 6. 1. 22:19

 

 

 

 

오늘 곱씹어 본 문장

"결점을 고치거나 애덕을 보존하기 위하여 공정한 이치에 맞게 다소 엄격한 점이 있더라도, 즉시 놀래어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말아라.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니, 주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그분의 교훈을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 아멘."(머리말 47-50)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Pro. 48)을 한참 생각했다. 지난 20년의 수도생활, 혼자 남겨졌던 스무살 이후의 시간, 애쓴 만큼 돌아와주지 않던 일들이 자꾸 생각났다. 그로인해 실망하고 서운하고 허무했던 감정들도 아직 남아있는지 묵상 시간이 조금 아팠다. 그래서 공을 들여 그 이후의 일들을 일부러 떠올려봤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해 내고 생각해 봐도, 좁은 문을 통과하고 나면 그 다음엔 아름다운 길이 펼쳐졌었다. 세상에 혼자 떨궈졌다 싶었을 때에도 내 곁은 좋은 사람들로 넘쳐났고, 힘든 시간을 통과할 때도 나는 끊임 없이 위로 받고 응원을 얻었었다. 하나를 잃고 나면 조용히 채워주시던 은총의 순간들이 얼마나 많고 많았나. 

 

내 삶은 좁은 길이 아니라 좁은 문(마태 7,13)이었다. 좁은 문을 통과해서 펼쳐지는 길. 수도생활 역시 끝없이 이어지는 좁은 길이 아니라, 좁게 시작할 뿐인 구원의 길이다. 안타깝게도 성경에도, 규칙서에도 들어선 후엔 길이 넓어진다는 말은 없다. 대신 성인의 말씀처럼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니', 하느님 뜻대로 나아갈수록, 내 마음이 넓어져((Pro. 49) 더 이상 개의치 않게 된다.

 

"당신께서 제 마음을 넓혀 주셨기에 당신 계명의 길을 달립니다."(시편 119,32) 시편을 읽으니 누가 내 마음을 넓히시는지를 알겠다. 마음마저도 넓혀주시는 하느님께서 하셔야 할 일을, 하느님 없이 나혼자 해보려 그리도 바둥댔으니 허덕이다가 흐지부지 되더라도 당연지사 아니었겠나. '당신'에서 다음으로 넘어가 보니 '넓혀 주셨기에'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넓혀 주시기에'가 아니라 이미 '넓혀 주셨기에' -이미 내가 하느님 앞에 기도하고자 앉아 있다면 그분의 넓혀 주심이 시작되었겠지- 나는 당신의 계명의 길을 달린다. 내가 하고자 마음 먹고 기도를 올리면 이미 그분은 넓혀주시기 시작하셨고, 비로소 나는 그 길을 달릴 수 있음을 왜 이리 더디 깨닫는가. 길이 넓어지지 않았다 해도(늘 현실은 제자리가 아니던가) 내 마음이 넓어졌기에 나는 구원의 길을 '달릴 수' 있다. 이렇게 나를 다독여주며 베네딕도 성인은 덧붙인다. "주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사랑은 어떤 것에서도 힘든 것을 모른다."는 예로니모 성인의 말처럼, 이제 내가 걷는 길은 넓거나 좁은 길이 아니라 그저 하느님과 함께 가는 길, 사랑의 길일 뿐. 오늘 밤 반추기도 때 되새김질할 만트라를 하나 얻었다.

 

당신께서 넓혀 주셨기에 (시편 119)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성규 머리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