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닐 지음. 김현우 옮김. 반비.
글을 읽으며 누군가의 '생'에 대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덧붙이거나 생각을 풀어낼 수는 없는 글.
그래서 생각난 시를 읊조려 보는 걸로 감상을 대신하고 그만 마무리해야겠다.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 김선우,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중에서 -
p.15 "자유로운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p.28 "동화가 아이들의 이야기인 이유는, 아이들을 위해 쓰인 것이라서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인생의 초반기, 다른 사람들은 내게 힘을 행사하지만 정작 나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는 그 시기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화에서 ‘힘’자체가 살아남기에 적합한 수단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보다는 힘없는 이들이 연합하여 성공을 이룰 때가 많은데, 이는 종종 서로에 대한 친절한 행위에서 비롯된다. 망가뜨리지 않은 벌집, 죽이지 않고 풀어 준 새, 존경의 마음으로 맞아 준 노파 같은 존재들이 그 행위를 되갚아 준가. 미약한 존재에게 씨앗처럼 뿌렸던 친절이, 동화에서 그리고 가끔은 현실에서도 위기의 순간에 결실을 맺는다."
p.53 "세상이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우울함은 말 그대로 푹 꺼진 웅덩이다. 자아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양쪽 방향 모두로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며,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풍경 안으로 들어온 광활함, 이야기로부터 당신을 끄집어내는 광활함이다."
p.83 ~ p.84 "본인이 완벽히 정당하다고 느끼는 사람, 자신이 해을 끼쳤음을 모르는 사람, 본인만 모르고 다른 사람은 다 아는 의도가 담긴 어떤 말을 하는 사람, 늘 복잡한 이유를 들이대거나 그저 잘 까먹는 사람. 우리는 모두 한때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을 보지 않는 방식은 정교하다. 분열, 투사, 기만, 망각, 정당화 등 많은 방식으로 사람은 견딜 수 없는 현실이라는 장애물을, 우리 자신의 얼굴을 한 괴물이 숨어 있는 미로를 피해 간다. "
p.83 "자신을 모른다는 것은 위험하다. 본인과 다른 사람에게 모두 그러하다."
p.150 "젊은 게바라는 남미 대륙과 세계 전체가 어떤 부당함에서 기인하는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진단했으며, 그에 대한 처방으로 혁명을 제시했다."
p.151 "고통에도 목적이 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도 않는다.’"
p.153 "당신이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아니다."
p.157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을 본인이 겪었던 고통과 비교해 해석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일이다. "
p.158 ~ p.159 "다른 이의 것까지 느끼는 이들은 확장할 것이며, 모든 존재에 공감하는 이들의 경계는 아예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홀로 있지 않으며, 외롭지 않고, 우리 자신이라는 섬에 발이 묶여 버린 이들과 달리 취약하지 않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취약하다. 그럼에도 타인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 지닌 위험은 상당히 강력해서, 많은 이들이 그 앞에서 물러나고, 그런 물러남을 정당화하는 이야기를 고안해 낸다. 그런 식으로 자신들이 수축해 버렸음을 잊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p.158 "동일시라는 말은 나를 확장해 당신과 연대한다는 의미이며, 당신이 누구와 혹은 무엇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정체성이 구축된다. 신체적 고통이 자아의 신체적 경계를 정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동일시는 애정 어린 관심과 지지를 통해 더 큰 자아라는 지도의 경계선을 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신적 자아의 한계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사랑의 한계다. 그러니까 사랑은 확장된다는 이야기다. 사랑은 끊임없이 뭔가를 덧붙여 가고, 가장 궁극적인 사랑은 모든 경계를 지워버린다."
p.164 "의사라는 직업에서 성공하기 위해, 그들은 감정이입과 냉담함 사이의 균형, 가까이 가기와 거리 두기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고, 자신들은 물론 환자들의 안녕을 위해 자기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정확한 거리를 찾아야 한다. 마치 부모처럼, 의사들도 가끔은 즐겁지ㅡ않은 일을 해야만 하고, 그런 식으로 타인의 불편함에 차츰 익숙해진다."
p.207 "슬픔은 늘 거리와 공간을 가지고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반면, 최상의 행복은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마치 집에 있는 것 같은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슬픔과 행복은 각각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
p.251 "거리를 두고 보면 어떤 법칙이나 관련성을 보게 되고, 대상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너무 가까이서 보면 대상은 그저 표면밖에 없거나, 무질서하게 한데 뒤섞여 버리고 만다."
p.284 "당신은 당신의 욕망과 필요 혹은 관심에 부합하는 것을 선택하여 듣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화가 너무 잘 통하는 세상은 삶을 온통 편안한 것과 익숙한 것만 비춰주는 거울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고, 그 반대의 세상에도 마찬가지로 위험은 있다. 주의해서 귀를 기울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