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미워해도 될까요
피에르 볼프 지음. 김인호, 장미희 옮김. 생활성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너무도 당연한? YES를 하지 못하거나 해선 안 된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가끔씩 집어 드는 영적 독서들은 대부분, 고민 중에 있어서 나에게 대화를 청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은 많지만 부족한 내 표현을 다듬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인데, 이 책도 내게(내가 만나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참 필요한 책이었다.
성경 공부반이나 복음 나누기 모임에 가서 이야기를 하다가 내용이 깊어질 때 곧잘 들려주는 말들이 있다.
“하느님께 왜냐고 자꾸 물어라.”
“하느님한테 대들고 따질 줄 알아야 한다.”
“고민이나 사고를 쳤을 때 수습하고 장리 다 끝낸 후에 하느님 앞에 갈 생각은 하지 마라. 지금 가라. 고민이건 두려움이건 수치심이건 죄책감이건 분노건 뭐든 다 가지고 지금 하느님 앞에 가라.”
나 역시 선뜻 하느님 앞에 나아가지 못했던 적이 많았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생각만큼-내가 그동안 믿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쉬운 것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어떻게든 그분 앞에서 도망을 쳤다. 마치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숨을 곳을 찾았던 것처럼창세 3,8. 하느님이 내 이름을 부르시며 애타게 찾으시는 순간창세 3,9이 와야 겨우 울며 겨자 먹기로 하느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숨어 있는 그 순간에도 하느님이 두려운 만큼 용서받고 털어버리고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예전처럼 회복하기를 바라는 갈망이 얼마나 크게 집요했던가. 하느님 앞에서 모든 것을 털어낸 후의 기분이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기쁨, 또한 내가 타인을 용서하는 기쁨,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변함없는 용서의 아버지라는 확신은 내 삶의 아주 큰 원동력이다.
하느님 앞에 선 순간조차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얼마나 우리 자신을 가리고 싶어하는가. 아름답게 가리기도 하고, 슬쩍 눈 감고 잊은 척 내 지난 과오를 가리기도 하지만, 우리는 매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가야 한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미워하고 오로지 분노로만 가득 차 있더라도 말이다.
p.9 "폭력과 파괴, 크고 작은 분쟁과 전쟁이 난무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화와 증오의 감정은 매우 빠르게 느껴집니다. 이 감정들을 느끼면 우리는 가장 먼저 그런 감정들이 영적인 삶에는 필요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 그것들을 하느님께 숨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경건하거나 감상적인 순간들로만 축소시켜 맺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인 삶은 힘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들을 영적인 삶에서는 빠르게 분리시켜 버립니다."
p.24 "고통 당할 때 우리는 소통이 얼마나 필요하고 본질적인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고통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 있기를 바랍니다."
p.25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자신에게 무관심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됩니다."
p.25 "중립적인 자세로는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p.30 "우리의 일상은 그 사람을 사랑할 때보다 미워할 때 훨씬 더 강하게 그 사람에게 집중됩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보다 더 우리의 전 존재를 빨아들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p.30 "정말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미움과 증오가 소통의 한 형태라는 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소통이 긍정적인 유대와 서로에 대한 따뜻한 끌림만을 의미한다고 너무 쉽게 믿어 버리기 때문이지요."
p.33 "내적인 증오가 단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게 되는 때가 올 수 있는데, 종국이는 살인을 해서라도 가 미움의 대상을 제거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p.34 "증오는 매우 집요해서 제거 대상이 죽은 후에도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살인도 증오심이라는 강박을 제거해 주지 못합니다. 미움의 대상은 미워하는 사람 안에 계속 ‘살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p.35 ~ p.36 "미움의 대상은 미움을 통해 계속 우리와 함께 머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죽이는’, 곧 그를 제거하거나 우리 삶에서 무의미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진짜 방법은 바로 ‘무관심’입니다."
p.40 ~ p.41 "혐오감, 화, 실망감, 분노 등의 감정들이 오래 지속될 때, 우리는 상처 입은 사랑이 증오로 폭발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아러한 위험을 극복하는 유일한 수단은 증오라는 감정을 드러내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분노를 초래한 사람에게 분노를 표현’해야 문제가 풀립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p.44 "우리가 표면적으로 느끼는 감정들과 즉각적인 반응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항상 잠시 숙고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p.53 "우리는 상대방의 행동이 대해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자신의 상태가 판단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측은지심을 갖는 것은 동의하는 것과 다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연민은 항상 소통을 필요로 합니다."
p.54 "욥의 친구들은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은 오직 침묵 중에 욥과 함께 머물러 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p.57 "우리 자신이 고통을 겪고 있지 않을 때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충고하며 그 사람의 고통에 대하여 설명하고 위로하는 것이 쉽게 여겨집니다."
p.68 "만일 내가 혐오감과 억울함과 분노와 증오심까지 더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면, 나는 이 모든 감정을 하느님 아버지께 표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표현해야만 한다는 것을 욥과 함께하는 기도를 통하여 배우게 됩니다."
p.76 ~ p.77 "종종 우리는 화를 내거나 미워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나쁜 것이며, 그러한 감정에 관하여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여깁니다. 하물며 그런 감정의 대상이 주님이라고 상상해 보세요."
p.83 "반항심, 억울함, 분노 또는 증오와 같은 감정들은 암처럼 우리를 집어삼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비참함에 죄책감이라는 또 다른 짐을 보탭니다."
p.85 "말은 표현되는 순간 해방됩니다. 우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는 분이 바로 육화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내신 ‘말씀’이시라는 것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p.87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하느님께 대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약함’에 관대하기 때문입니다."
p.89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유다인들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말씀드렸던 것처럼, 마음에 품은 말을 표현하는 일일 겁니다."
p.90 "저의 기도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제가 옳은지 틀린지, 저의 말이 선한지 나쁜지가 아닙니다. 제게 가장 의미 있는 질문은, 제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모든 것을 그분께 다 말씀드릴 수 있을 만큼 제가 충분히 사랑하는지, 그리고 나의 슬픔을 이해하시고 그 슬픔을 어떤 방법으로 표현하든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여 주시는 그분의 엄청난 사랑을 믿는지와 같은 단순한 것입니다."
p.107 "우리의 항의는 파괴적인 언어나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는 주변 사물이나 상황, 다른 사람이나 우리 자신까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끌어내리는 허무주의적 관점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p.124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대면해야 합니다. 화가 났으면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미워하고 있으면서 그 감정을 나 자신이나 하느님께 숨기고, 듣기 좋은 이름으로 바꾸어 불러서는 안 됩니다. 내가 느끼는 것이 미움이면 그것은 미움인 것입니다. 사실을 숨기는 것은 거짓된 행위입니다."
p.125 "하느님은 나의 마음을 깊이 꿰뚫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미움을 느낄 때 이미 그 사실을 매우 잘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조금 더 쉽게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사실을 부인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일 진실을 숨기면, 마음의 문이 닫힐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p.126 ~ p.127 "진실만이 주님과의 통교를 위한 유일한 길이므로 이것을 숨길 때 우리는 막다른 길에 서 있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느낌은 우리 삶 곳곳에 스며 있으며, 삶 전체가 그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p.126 "우리가 지닌 미움과 억울함을 본래의 이름으로 불러 주지 않는 것은, 곧 주님으로부터 상처를 숨기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안에 주님께서 치유해 주셔야 할 상처가 있다면 바로 이러한 숨겨진 상처들입니다."
p.127 "주님은 현실적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 찾아오실 수 있습니다."
p.128 "우리는 ‘그분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까? 어느 독일 신학자에 따르면, 이 말은 슬픔이 있는 곳이면 주님께서 가시지 못할 곳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 찾아오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미움이라는 것은 일종의 ‘지옥’과 같지 않습니까?"
p.138 "우리는 느끼는 대로 표현할 뿐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바쳐야 합니다. 나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자체가 이미 봉헌이지만, 우리는 모든 감정을 내가 의식적으로 드리는 선물로 만들려고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p.152 "우리는 매우 자주 가장 좋은 선물, 곧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선물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불완전하고 애매모호한 선물을 드리는 것만 가능한 죄인이라는 사실은 자주 잊어버립니다."
p.156 "내가 누군가를 정말 싫어할 때, 미움에 깊이 사로잡혀 있을 때, 잠시 동안 나의 정체성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을 포기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인 나 자신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게 됩니다."
p.158 "우리 안에서 느끼는 힘의 파괴적인 측면에 매료되며 그 파괴적인 힘에서 비롯되는 아찔함과 사라짐에 이끌립니다. 또한 사라지는 것이 휴식과 다름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단순한 치통이라 하더라도 그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빨리 끝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격렬한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군가가 자살을 꿈꾸며 수면제를 먹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닙니다."
p.160 ~ p.161 "어떤 때에는 우리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고 싶기 때문에 그 화와 미움이라는 ‘보물’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을 피해자로 여기면,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고발할 권리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피해자로 남는 것을 즐깁니다. 그렇게 상대를 계속 공격함으로써 ‘죄가 있는’ 사람이 피해자인 자신에게 계속 속박되어 그 ‘죗값’을 치르게 합니다. 때로 피해자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얻게 된 복수의 힘을 권리로써 박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
p.161 "미움을 포기한다는 것은 다시 화해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키워 나갈 만큼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인정하고, 복수를 위하여 상대방에게 행사하려던 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p.162 "우리는 하느님께 화가 나는 것을 느끼자마자 그분이 우리에게서 멀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을 통하여 여전히 상대방과 혹은 주님과 소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간의 유대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p .169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한, 미움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상대방에게 표현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무엇인가가 이미 변화하고 있는 것이고, 어쩌면 이미 변화했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