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食性 人間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하나 뿐인 마음 2018. 1. 11. 11:32


김은주 지음. 봄알람.

생각하지 말기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은 여자들의 이야기. 그녀들이 처한 상황이나 받은 대우의 부당함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이 살아간 이야기에 밑줄 긋고 주목하며 읽었다.
내 삶을, 네 삶을, 이 세상을 눈여겨 들여다보고 곰곰히 생각하며 방향을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을 멈추지 말 것. 내겐 이것이 기도니까.

p.39

"일평생 자신을 문젯거리로 여기며, 20세기와 더불어 사유하고 개입했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다. 그가 신뢰한 이러한 ‘인간성’은 혼자 힘으로는 절대 획득되지 않는다. 인간성은 홀로 만들어질 수 없으며, 자신의 삶과 존재 자체를 공공성의 영역으로 향하는 사람들만이 함께 성취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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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3

"스피박은 자기의 언어로 말하기 위해, 오랫동안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과 더불어 목소리를 높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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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8

"버틀러는 인간 규범의 보편성과 항존성을 의문시하면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인정 규범의 다양한 기준을 제기한다. 규범은 나를 살게 하기도 죽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규범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 세운다면, 그냥 죽을 수는 없다. 규범과 더불어서 살기 위해서라도 규범을 비판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버틀러가 인정 개념을 중요시한 것은 사회와 동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인정에 대한 성찰은 인정 규범을 비판하면서, 같아 지기만을 요구하는 사회에 저항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넓히고 확립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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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8

"평등이 의미하는 바가 남녀의 똑같은 대우를 의미하는가? 정의는 공정한 대우와 같은가. 페미니즘은 자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더 분명하게 만들고 갈등을 일으키는 해석들과 타협하기 시작하려고 노력하면서 비평적 관심을 바로 자신의 전제와 관련되도록 함으로써 전진해나가는 운동이다. 페미니즘은 젠더 관계의 사회적 변화에 관한 것이다. 삶의 문제와 인간의 문제를 다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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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5

"해러웨이는 ‘죽음’을 인정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는 의미를 이야기한다. “죽음의 긍정이 절대적인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찬미한다는 의미에서의 긍정이 아니라 , 솔직히 말해서, 죽어야 할 운명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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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1

"시몬 베유는 중력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 조건을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검토한 인물이다. 그는 우리를 중력에 묶어두는 구속력과 이에서 벗어나려는 정신의 운동에 관해 사유한다. 시몬 베유에 따르면, 두가지 힘이 우주를 통치한다. 빛과 중력, 두 힘은 물리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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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2

"어쩔 수 없이 중력의 작용에 얽매여버리는 인간 실존의 강렬함에서 부조리는 생겨난다.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 는 자기 변호가 충돌할 때, 삶은 한없이 가볍고 비루해질 수 있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 앞에서, 중력의 무게는 숨통을 짓누르듯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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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2 ~ p.123

"시몬 베유는 무중력에 난파하여 떠돌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베유는 잔혹한 삶의 조건을 사유하면서도, 그 삶에서 기쁨을 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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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4

"철학자 베유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거기에 존재하는 자신의 실존을 생생하게 의식하고 이해하려 시도한다. 성찰에 필요한 거리를 갖고 자신을 바라보고,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나의 고통, 다른 이의 고통 그리고 인간의 고통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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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4

"가깝고도 친밀한 이들의 고통을 넘어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사람들의 실존에서 일어나는 불행까지 사유하면서, 그는 곧장 넘어설 수 없는 벽에 직면한다. 어떤 이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실로 극심한 고통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벽 앞에서 자신의 사유를 삶에 맞붙인 채, 베유는 믿고 소망했다. 삶과 직접 마주해야만 언어는 훼손되기를 멈추고 사고는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는 결국 타인의 고통을 사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체험하기로 한다. 한 개인의 고통에서 더 나아가, 인간 실존의 고통을 직접 경험하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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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5

"베유는 인간의 이성이 나락으로 치달은 두 세계대전 사이에서 기꺼이 우둔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그것을 은총이라 불렀다. 그는 이것을 중력의 삶에서 예외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했다. 어리석은 선택을 통해, 그는 연민과 사랑 그리고 인간에 대한 경외감을 잃지 않는다.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그런 시몬 베유를 ‘현대의 성자’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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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6 ~ p.137

"인간은 고통을 겪게 되면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혹은 동정심을 유발하며 자기의 고통을 쏟아낸다. 이를 통해, 고통을 줄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 타인을 괴롭히는 과정에서 고통은 계속 이어질 뿐 아니라 더 커진다. 고통은 악순환한다. 고통의 악순환은 많은 경우 피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발생하며, 고통받는 자는 고통을 준 문제에 직면하거나 이를 끊어내고 저항하기보다는, 보다 약한 자를 괴롭힌다. 고통당한 사람들끼리 서로를 갉아먹으면서, 상처와 고통을 심해진다. 이런 고통의 악순환이 가장 약한 자를 “독살시킨다”고 베유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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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7 ~ p.138

"자기는 아무런 탈 없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가령 아랫사람에게 화풀이를 하고 상대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는 때-은 에너지를 써야 할 것을 아끼는 것으로, 타인이 대신 그 에너지를 쓰게 된다. 어떤 욕망이든 그것을 부당하게 만족시키는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해서 절약된 에너지는 곧 훼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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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8

"고통의 악순환을 어떻게 끊어낼 수 있는가? 베유는 고통을 준 자들에게 복수하거나 고통 그 자체의 감정을 자신보다 약한 이들에게 전가하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중력이라는 조건 속에서 발생하고 마는 고통과 해악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격하하거나 손상시키지 않을 수 있는 방식을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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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9

"베유는 중력 속의 삶이라는 상황을 폄하하는 대신, 중력을 통해 은총에 대해 생각했다. 은총은 빛을 받아 자라나는 엽록소와 같다. 은총은 누군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엽록소를 만들어 생장하는 삶이다. 중력은 나쁜 것이기만 할까? 중력을 통해 스스로를 낮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신의 삶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것은 인간을 중력에서 가벼워지도록 즉 ‘높아지는’ 상태로 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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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9

"은총에 다다르는 활동은 결코 중력에서 벗어난 무엇이 아니다. 은총은 고통스러운 중력을 체감케 하는 매일의 현실에서 기꺼이 중력 속에 머물려고 하면서, 영혼에서 일어나는 초중력적인 상태를 경험하는 일이다. 그래서 베유는 고통받는 이와 함께 고통받으며, 일치된 사유와 삶을 사랑하고자 했다. 인간의 고귀함을 앗아가는 중력들, 억압, 고통, 궁핍, 박탈감...... 그 속에서 자신을 진공으로 비워 순수한 집중에 머무른다면 영혼은 은총을 경험할 수 있다고 베유는 믿었다. 은총에 다다르는 길은 잘못된 것을 ‘심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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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0 ~ p.141

"더 나아가 베유는 불행으로부터 자기 연민이나 위안을 얻지 않으려 한다. 자기 연민은 자기 집착과 환상을 가져오면서 중력의 지배에 굴복하게 한다. 베유는 죽을 것만 같은 고뇌를 겪고 연민조차 없는 암흑의 밤을 통과한 끝에 무기력한 영혼은 자아라는 중력의 지배를 벗어나 은총의 빛으로 밝아진다고 믿는다. 중력장의 삶을 은총에 깃든 삶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한 시몬 베유는, 이후 이 신비를 예수에 대한 굳은 종교적 믿음으로 전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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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0

"시몬 베유를 평생 시달리게 한 것은 자아라는 딱딱한 알맹이였다. 그에게는 스스로를 세계의 심판관처럼 여기며 자신만을 위하고 자신의 고통만을 울부짖으며 타인을 도구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고통받는 이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죄책감이라는 이중의 칼날을 지닌 검은 때로 사람을 외부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지만, 판단과 결합한 죄책감은 자신이 돕지 못한 사람을 도울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여기면서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 또는, 오히려 죄책감은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방어적 행동으로 변질되어 폭력의 상황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무기력으로 사람을 침잠시키기도 한다. 시몬 베유는 그렇게 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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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1 ~ p.142

"베유는 고통 속에서 겪는 불행을 사랑의 역량으로서 파악했다. 그는 이때, 박탈당하여 고통에 시달리는 장소가 투명한 빛으로 충만한 새로운 은총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이듬해,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와 베유는 다시 이와 같은 영감을 경험한다.
“1938년에는 솔렘수도원에서 성지주일부터 부활절 화요일까지 열흘간 모든 미사에 참석했다. 당시에 나는 극심한 두통을 겪었다. 소리 하나하나가 나를 때리는 것 같았다. 죽도록 주의력을 집중한 끝에 그 비참한 육신에서 벗어난 육신은 홀로 고통을 겪도록 내버려두고 전에는 몰랐던 아름다운 노래와 말에서 순수하고 완전한 기쁨을 찾을 수 있었다. 그때의 경험에서 유추하여 불행을 통해서도 신의 사랑을 사랑할 수 있음을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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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2

"베유가 통찰한 영성은 신과의 일치와 그의 밝음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라, 어둠과 고통이 깎아낸 파임과 거기에서 드러나는 빛이다. 처참한 불행의 상황 속에서 고통의 의미를 묻다가 삶이 추악해져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고통 앞에서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하고 묻지만 신은 대답이 없다.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은 정신이 산산조각 나서 끝없이 절규하다가, 허무에 도달할 뿐이다. 이 허무는 영혼 전체를 공포로 넘쳐흐르게 한다. 베유는 여기서, 이 공포 앞에서, 삶을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아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베유는 “십자가를 통해 희망을 건져내려고 허무 속으로 투신”한 예수에게 탄복한다. 영혼의 어두운 밤에도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 혹은 우리의 세계를 궁극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이 사랑으로부터 절망과 황폐한 세계를 다시 살리고, 정의를 세울 씨앗을 뿌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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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3

"시몬 베유의 삶은 “고의적인 어리석음의 연속”이었다. 베유는 근대적 사유의 끝에 서 있었다. 그는 ‘다르게 사유하기’가 시작되기 직전의 어두움 속에서 사유의 에너지를 행위로 변화시켜 온몸으로 겪은 사유를 또한 실현해낸 철학자였다. 권력으로 인간을 예속하는 것을 경멸하면서 아나키스트가 되었고 폭력을 역겨워하면서 평화주의를 선택했다. 베유는 근대의 전체주의가 낳은 ‘집단’이라는 괴물을 못 견뎌했다. 생애 마지막에 신학적 비전에 도달한 것은 베유가 온 마음을 다해, 허무 속에 빠지지 않고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영혼에 관심을 둔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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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75

"함께 싸운다는 것은 나와 비슷한 고통에 바로 공감하여 연대하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동일시에서 비롯된 고통은, 내가 느껴본 고통에만 민감한 데 그쳐버릴 수도 있다. 고통에 공감하여 연대한다는 말을 내가 느껴본, 혹은 나와 가까운 이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대로만 오인할 경우,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의 서사 일부로 통합하는 근대적 습관에 빠지기 쉽다. 고통의 가치를 규정하는 최종 심급을 ‘나’라는 자기중심으로 수렴하는 방식을, 여성주의 운동은 지양해야 한다. 자기중심적 서사 구축에서 벗어나, 차이를 사상하지 않으면서, 차이에서 의미 있는 실천을 이끌어내기 위한 윤리적 태도와 서사의 방법이 분명히 필요하다. 이것은 결코 종결될 수 없는 여성주의의 과제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