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食性 人間

종의 기원

하나 뿐인 마음 2016. 8. 9. 16:26

정유정 장편 소설. 은행나무.


정유정 작가의 이야기는 시작부터 결말이 궁금해진다. 물론 읽으면서 뒤따라 드는 생각은 '난 어떤 결말을 원하는 걸까?'


폭풍을 피할 항구 같은 건 없다. 도착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폭풍의 시간은 암흑의 시간이고, 나는 무방비 상태로 거기에 던져진다. 


폭풍치는 하늘이 어두운 것은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구름이 빛을 가려서라고 생각했었다. 내 인생에 폭풍우가 몰아 치던 때에도 언젠가 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이 드러나겠지 했다. 물론 대부분은 그랬다. 하지만 어제의 하늘과 오늘의 하늘이 다르듯 폭풍치던 날 칠흑색 하늘과 높푸른 맑은 가을 하늘은 다르다. 오늘은 오늘의 하늘 아래에서 살아야 하고, 내일 역시 내일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야 한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물었다. 해진은 다시 시간을 두었다가 대답했다. "그래도 한 번쯤 공평해지는 시점이 올 거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그러려고 애쓰면요."


유진의 세상과 해진의 세상, 엄마의 세상은 서로 달랐을까. 그랬을테다. 애쓰면 세상이 달라질까. 이 문장을 읽은 후 난 책을 덮었었다. 한 번쯤 공평해지는 지점.... 기억하겠다 하면서도 수시로 잊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도 공평해지는 지점이 올까. 적어도 인간이 인간에게 부여한 불공평이라면 그건 하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지 않는가. 그들을 그렇게 몰고 간 '악'한 이들을 생각하다 보니 정유정의 소설보다 내가 사는 세상이 더 전대미문 재난 소설 같다.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뼈 시리게 외로운 날, 바람이 분다. 울고 싶은 밤에 비가 내린다. 인간이 싫은 날, 보름달이 뜬다. 몸도 마음도 무거운 날, 날씨까지 무겁다.


나를 움직인 건 기적의 힘도, 의지의 힘도 아니었다. 온전히 다음 한 발짝에만 집중하는 단순성의 힘이었다.


"도덕적이고 고결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금지된 행위에 대한 환상, 잔인한 욕망과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환상이 숨어 있다. 사악한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는 음침한 욕망을 행동에 옮기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프로이트-


엉뚱하게도 미운 오리 새끼를 떠올린다. 어른이 되어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혼자서 삐죽거렸었다. 아름다운 백조가 되어 날아가 버리면 함께 살던 오리들은 어쩌라는 건가. 제 분수도 모르고 '다름'을 미워하고 괴롭히기만 한 어리석은 존재들이란 말인가. 백조가 백조인 것은 백조로 태어났기 때문인 건데, 왜 더 못난(오리도 충분히 귀엽지 않은가 말이다) 오리는 더 못한 존재처럼 규정되고 자신을 되찾기 위해 별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적어도 동화에서는) 백조는 더 멋진 존재처럼 규정되는가 말이다. 그러면서 뒤따라 오는 질문은 난 지금 백조가 못마땅한 건가, 안데르센이 못마땅한 건가, 나 자신이 못마땅한 건가.


내가 오리라서 불만이 아니라 내 안의 무엇이, 혹은 내가 내맘대로 허락해 버린 내 안의 못난 본성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못마땅해야 한다. 오리로 태어났음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르게 생긴 내 옆의 백조를 못살게 굴고 함부로 대했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볼품 없다 여겨지는 것을 하찮게 보는 나를, 세상의 잘못된 잣대를 비평 없이 받아들이고 생각 없이 수많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태평했던 나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 안에는 천사도 악마도 함께 살아가고 있고, 천사와 손잡지 못하고 악마의 속삭임에 쉽게 귀기울이는 나의 얼굴을 바라봐야 한다. 


이제 내가 왜 인간의 '악'에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 대답할 차례다.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분신 유진이 미미하나마 어떤 역할을 해주리라 믿고 싶다. -작가의 말-


피냄새가 훅 끼치면 스멀스멀 시작되는 유진의 본능. 책을 덮으며 나를 흥분, 고무시키고 최고치로 밀어부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