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마고.
농담처럼 주고 받는 말들 중에 '희미해졌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 열심이던 마음이 희미해지고 시간은 우리를 조금씩 녹슬게 한다는 말일 것이다. 주어지는 난관도 하느님 뜻대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아무리 피곤해도 지친 몸으로 꼬박꼬박 성당에 머무르고 날카로운 말에 날선 반응을 하지도 않고 기꺼이 주려고 하고 험담엔 귀를 닫고 희생, 절제, 봉사를 마다하지 않았던 시절이 그저 '열심' 혹은 '젊음' 덕이었다고 생각하며, 지금의 이 적당한 타협과 자기 위안을 세월이 선사해주는 당연한 보상처럼 생각하고, 믿음의 수덕도 도덕적 수양도 그저 버티고 살아가는 것으로 그럭저럭 넘어가고 있으면서 그저 '희미해졌다'는 한 마디를 하는 것으로 자성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우리 삶의 어느 한 순간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것, 비록 그것이 내 의지대로 되살아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이 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수련소 시절의 첫 마음, 입회 전 그 굳은 결심들이 이젠 희미해지고 사라졌다라는 변명은 더 이상 변명이 될 수 없음을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뇌의 어느 한 부분이 이상을 일으키게 되면 기억이 삭제 되기도 하고, 고스란히 남김없이 되살아나기도 하고, 왜곡된 기억이 생생한 기억으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왜곡된 기억 혹은 왜곡된 사실(환각)이 일어나는 환자의 경우 '거짓'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전의 '진실'을 끊임 없이 기억해야 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다리을 잃었으나 다리에 대한 감각이 실제로 느껴지는 경우 다리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를 구분하는 것. 내 비록 좋은 지향으로 시작한 일이라도 지금 어긋난 길을 걷고 있다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자족 섞인 위로로 살아갈 게 아니라 괜찮았던 '나'가 지금은 분명 '어긋난 길을 걷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내 삶이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
치료 과정이 모든 것을 좋게 만들지는 않는다. 투렛 환자의 경우,
할돌을 투여하는 동안은 성실하고 분별력 있고 반듯한 사람이 되지만 그토록 민첩하던 두뇌회전도 느려지고 대답도 느릿느릿한다. 기지의 틱 혹은 틱의 기지로 재치를 발휘하는 일도 없어졌다. 탁구나 그밖의 게임을 즐기지도 않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지도 못하다. 상대를 죽일 듯이 달려들던 성급한 본능, 상대방을 이기고 깔아뭉개야 성이 차던 본능도 더 본능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 경쟁심이 사라지고 말수도 적어졌다. 주변 사람들은 놀라게 하던, 재빠르고 갑작스럽고 당돌한 행동에 대한 충동도 사라졌다. 예전의 외설스러움, 뻔뻔함, 용기도 모두 잃었다. 그는 뭔가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회복, 옳음)의 상태가 과연 언제나 추구해야 하는 상태인 것인가. 수도 생활만 보더라도 자연스럽지 않은 삶, 거스르는 삶이 아닌가.
우리는 기묘한 세상과 접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통상적인 상식이 뒤집히는 세계이다. 병리 상태가 곧 행복한 상태이며, 정상 상태가 곧 병리 상태일 수도 있는 세계이자, 흥분 상태가 속박인 동시에 해방일 수도 있는 세계,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몽롱하게 취해 있는 상태 속에 진실이 존재하는 세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큐피드와 디오니소스의 세계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필요하다면 되살려서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즉 지금까지의 이야기인 내면의 드라마를 재수집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한 편의 이야기 즉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이야기에 대한 필요성, 아마도 그것이 톰슨 씨가 장광설 만들기에 필사적인 이유를 설명해주는 단서이기도 할 것이다. 연속성, 즉 연속적인 내면의 이야기의 상실이 그를 일종의 이야기광이 되게끔 내몬 것이다. 끊임없이 말할 수밖에 없고,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지껄이며 몽상을 말한다. 진실한 이야기 혹은 연속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자기의 내적 세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꾸며낸 이야기를 쉬지 않고 지껄여대는 것이다. 가짜 인간들 즉 유령들이 사는 가짜 세상 속에서 그리고 가짜 연속성 속에서 가짜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내는 상태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코미디다. 그러나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다. 오싹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인간이, 어떤 의미로 광기 속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주변 세계는 하나하나 그 모습을 잃어가고 의미를 잃어가며 사라져간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필사적으로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자신의 발밑에서 항상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무의미라는 심연, 그 혼돈 위에 '의미'라는 다리를 놓아야 한다.
실제로 그는 달리는 것을 결코 멈출 수 없다. 매순간 다리를 놓고 단절된 상태를 수리하지 않는다면 기억, 존재, 의의 등의 단절을 결코 메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절을 메우기 위한 '다리'와 '연결'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허구이며 현실로서 제 기능을 수행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실과 일치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톰슨 씨도 그와 같은 사실을 느끼고 있을까? 아니, 질문을 바꾸어 그에게 '현실성'이란 어떤 것일까? 그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까? 그 자체로는 전혀 실재하지도 않는 환상과 허구로써 끊임없이 자신을 구원하려 몸부림치지만 자아 속에 매몰되어버린 인간, 실재하지도 않는 세계 속에 빠진 한 인간이 겪을 고통 속에서 그는 신음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즐거운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내면의 압박에 시달리는 사람이 그렇듯 그의 얼굴은 내내 긴장감으로 굳어져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그는 고통스럽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가 말해야 하는 실체 없는 이야기가 그의 구원이며 동시에 파멸로 이끄는 힘이기도 한 것이다. 그 때문에 표면은 빛나는 무지개처럼 쉬지 않고 변하지만 그 밑에서는 끝 모를 환상과 섬망의 심연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에게는 감정을 잃어버렸다는 감각이 없다. 그에게는 정체성과 현실성을 규정하는 그 오묘하고 신비로우며 엄청난 깊이를 상실했다는 감각이 없다. 그와 만난 사람은 누구나 그 사실을 깨닫고 놀란다. 그가 아무리 막힘없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더라도, 기묘하게도 그 이야기 속에는 감정이 들어 있지 않다. 현실과 비현실, 진실과 비진실(여기에서는 '거짓'이라는 개념을 쓸 수 없다. 오직 '비진실'이라는 말만을 쓸 수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 적절한 것과 초점이 어긋난 것 따위를 구별하는 판단력이라는 감각이 존재하지 않고, 남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 역시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정말이지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듯한 무관심이었다.
만일 그가 조용하게 침묵할 수만 있다면, 만일 그가 쉬지 않고 지껄이는 것을 멈출 수만 있다면, 만일 그가 환상이 빚은 기만적인 겉모습과 손을 끊을 수만 있다면, 그때(아, 그때야말로!) 그의 내면에 현실이 살아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진짜인 그 무엇, 깊이가 있는 진실로 느껴지는 무엇인가가 그의 영혼 속에 되살아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의 맥락을 다시 연결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모두 실패했다. 우리가 노력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덕 심하게 이야기를 지어냈다. 그러나 우리가 단념하고 그의 곁을 떠나면 그는 이따금씩 병원을 둘러싸고 있는 조용하고 평온한 정원을 거닐었다. 그는 병원에 딸린 정원의 정적 속에서 자신의 평정을 되찾곤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있으면 그는 흥분해서 되는 대로 지껄였고, 정체성을 되찾으려고 쉬지 않고 지껄이거나 비현실의 홍미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었다. 식물, 조용한 정원, 인간이 없는 세계에서는 사회적인 요구나 인간적인 요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럴 때 그는 정체성의 혼미 상태에서 벗어나고 흥분 상태에서 해방되어 유유자적한 평정을 되찾는다. 정적과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분위기가 주어지고, 나아가 주위가 인간을 제외한 온갖 것으로 채워져 있을 때에야만 그는 비로소 평온과 충족감을 맛보는 것이다. 인간의 정체성이니 인간관계니 하는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오직 자연만이 존재할 때 그는 자연과 말이 필요 없는 일체감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일체감을 통해서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가식이 아닌 진정한 존재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진정한 인간, 어디까지나 '개체'다운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충동과 싸워야 한다. 투렛 증후군 환자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을 방해하는 무시무시한 장벽에 직면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야말로 '경이'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지만, 그들은 싸움에서 승리한다. 살아가는 힘,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개체'다운 존재로서 살고 싶다는 의지력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충동이나 병보다도 강하다. 건강, 싸움을 겁내지 않는 용맹스런 건강이야말로 항상 승리를 거머쥐는 승리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