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진화의 숨은 고리 기생(寄生)
박성웅, 서민, 정준호 외 지음. EBS MEDIA 기획. MID.
읽다가 너무 흥미진진해서 다큐까지 모조리 찾아보았을 정도로 오랜 만에 재밌게 읽었고 누군가에게 주절주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여길 정도로 내게 활력을 불어넣어 준 책이었다. 마침 방학이라는 호조건이 있기도 했지만 오랜 만에 기생 동물과 숙주와의 관계, 특히 공진화의 과정을 지켜보며 '산다는 것'과 나와 나의 신과의 관계에 대한 숙고도 겸할 수 있었다. 기생에 대한 아주 편협한 지식만으로 살아온 내게, 내가 가진 좁은 한계 너머의 광대한 상을 보여준 이 책은 년 전 해고 노동자들의 삶을 접하고 난 후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선물처럼 또 다른 세상을 안내했다.
기생이라는 것이 자유를 버리고 안락(평화)를 얻는 삶이라고만 생각했지, 마치 욕구(본능)의 이중 역할처럼 전체 생태계 안에서 숙주와의 끊임 없는 자극 교환을 통해 유지, 발전 혹은 도태, 소멸이라는 과정을 이끌어 나가는 필수 조건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신체 기관들을 단순화시키거나 흔적 기관의 형태로 남겨 다른 생물에 붙어 살아가는 기생충은 지적 설계의 결과물로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들은 창조론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또한 대체 자비로운 신이라면 이런 미물들을 남겨둔 이유가 무엇인가. 다윈은 자신의 저서에서 기생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비로운 신이 다른 애벌레의 몸을 산채로 파먹으며 자라나는 기생벌처럼 잔혹한 생명체를 창조하고 유지시키는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요지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신은 대체 왜 이런 생명체들을 창조했단 말인가?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기생충학은 점차 의학과 더 많은 접점을 찾아갔고, 그러면서 생태적 측면에서의 고려는 많이 옅어졌다. 또한 생태계를 인간의 윤리 도덕에 빗대어 설명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면서 기생충이 생태적 의미에서 설 자리는 점점 좁아졌고, 기생충은 무조건 나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기생충을 박멸과 퇴치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시각들은 2차 대전 이후 여러 기생충 박멸 사업들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다른 관점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잊혀졌던 기생충은 생태계의 중요 조정자로서의 역할에 대해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온전히 악하기만 하거나 온전히 선하기만 한 것이 없듯이,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작용하듯이, 기생 동물들 역시 그 역할은 상대적이었다. 몇년 전 현대인들이 비만에 시달리는 이유 중의 하나가 몸 안에서 함께 살아가던 기생충들을 몰아내고 자기만 혼자 독식함으로써 빚어진 욕심의 결과라는 우스개 소리 같은 어느 기생충 박사님의 말을 듣고 스트레스 상황을 모두 처리해버린 사람은 결국 성숙의 여지마저도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더욱 확신히 든다.
우리의 몸은 내부에 기생충을 갖고 있는 것에 익숙하도록 진화해왔습니다.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적은 수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말이죠. 그래서 정글의 수렵채집인 같은 사람들을 보면 대다수가 기생충을 몸에 지니고 박테리아 감염에도 노출되어 있지만 그로 인해 큰 질병을 앓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그냥 기생충을 지니고 다니는 것뿐이에요. 그들의 면역체계와 기생충이 일종의 평화 협정을 맺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휴전이나 마찬가지죠. 그런데 갑자기 기생충을 이들의 몸에서 빼버리면 이들의 면역체계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 때문에 알레르기 반응이나 천식, 혹은 다른 자가면역성 질환이 급증하게 되죠. 한국이나 일본 등 국가가 발전하며 기생충을 없애는 데에 성공한 곳들에서는 이미 흔해진 패턴입니다. 그러니까 기생충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당신의 면역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현재 많은 과학자들은 이런 면역 체계를 기생충 없이도 잘 작동하게 하는 법들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 칼 짐머Carl Zommer 《기생충 제국》저자, 과학 칼럼니스트 -
하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기생 동물의 생활방식도 있다. 자신이 죽는 것도 서슴지 않고 알을 널리 퍼뜨리겠다는 개미선충의 행동은 삶이란 무엇이며 자식이란 또 무엇인지... 죽을 힘은 다해 물살을 거슬러 올라 산란을 한 후 죽음을 맞이하는 연어의 삶이 숭고해 보이긴 하나, 굳이 그럴 필요가...하며 갸우뚱하게 되는 것처럼 기생의 여러 형태 중 많은 경우가 아직은 내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긴 하다.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숙주는 기생충을 막기 위해 방어책을 개발해낸다. 이 방어책은 행동을 통한 기피일 수도 있고, 면역 반응을 통해 기생충을 체내에서 제거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진화의 과정에서 한발 앞서가는 셈이다. 하지만 기생충이라고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 숙주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더 조용히 다가간다던지, 혹은 숙주의 면역체계를 교란할 수 있는 물질을 내뿜는 기생충들이 진화의 과정에서 더 많이 선택된다. 이렇게 기생충이 또다시 숙주의 방어책을 무력화할 수 있는 공격법을 개발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서로의 진화를 유도한다. 끝없는 진화의 경쟁.
기생충은 흔한 유전형을 더 자주 공격한다. 기생충의 입장에서는 가장 보편적인 유전자를 지닌 숙주를 집중적으로 공격해야 더 많은 숙주를 보유하고 번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생물들이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수준이라면 사실 이렇게 다양한 유전형이 나타날 필요가 없다. 다양한 유전형을 만들어내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유성생식이다. 유성생식은 암컷과 수컷이 만나 서로의 유전 자원을 절반씩 섞어 자손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두 유전자원이 섞이는 과정에서 추가적으로 유전자 뒤섞임이 일어나면서 그만큼 많은 다양성이 확보된다. 그에 반해 무성생식은 자신과 똑같은 자손들을 복제해낸다. 유전적 다양성은 낮을지 몰라도 짝을 찾고 짝짓기를 하며 동일한 성을 가진 동족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자원 소모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컴퓨터를 통한 인공생명모의 실험에서 별다른 압력이 없을 경우에는 무성생식을 하는 집단이 크게 우세했다. 하지만 기생충을 집단 내에 집어넣자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무성생식 집단은 기생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유성생식 집단은 기생충에 저항하여 다양성을 확보하고 번성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성생식 집단이 유세를 점했다. 보다 정확히는 유성생식을 통해 나타난 '희귀한' 유전형들이 훨씬 자주 선택되었고 경쟁에서 우위를 보였다.
평소에는 무성생식을 하며 잘 살아가다가 외부에서 기생충이라는 강력한 진화적 압력이 등장하고 저항할 필요가 생기자 곧바로 유성생식을 하는 달팽이 집단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단기적으로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여 기생충에 저항할 수 있는 개체들이 늘어날 수 있는 방식이 유성생식이었기 때문이다. 즉 직관적으로 소모적이고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유성생식 집단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기생충에 대항하기 위한 생물들의 진화적 적응 방식이었던 것이다.
얼마 전 미국의 모든 주에서 '동성애 혼인'이 합법화 되고 이들의 신앙 문제 역시 크게 대두되고 있어 동성애에 관한 여러 글을 살펴보았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수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자극과 저항이 필수인 이성관계만에서라도 해방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는 건 아닐까, 모든 것을 이렇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또한 하나의 사회적 영향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감정적 동요로 인해 흘리는 눈물은 일반적인 눈물의 구성 성분과 큰 차이를 보였다. 일반적으로 눈물에는 물, 소금, 리소자임 같은 항균물질, 항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부물질이 들어와 눈물이 나는 경우에도 구성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슬퍼서 흘리는 눈물에는 단백질 함랴이 크게 높아쏘, 그 중에서도 프로락틴이나 류신 엔케팔린 같은 호르몬의 함량이 높았다. 류신과 엔케팔린은 체내에서 통증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 물질이다. 이는 감정적 동요로 인해 흘리는 눈물이 통증을 줄이고 기분을 좋게 하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외부의 통증과 침입 뿐만 아니라 감정적 고통에도 눈물은 중요한 방어기제임을 암시한다. 우리가 흔히 '악어의 눈물'이라 부르는 거짓 눈물의 진정성을 알아보려면 그 구성성분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Q. 모기와 같은 매개체를 박멸하는 것은 어떤가요?
A. 박멸이 문제가 되는 것은 완전한 박멸의 단계에 가까워질수록 생명체에 대한 자연선택의 힘이 더욱 커지게 되어 박멸하려는 노력을 우회할 수 있도록 진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병원균을 박멸하려할 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매개체를 박멸하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 생명체들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공격에 반응할 것이라는 거지요. 따라서 진화적 반응을 항상 고려해야 합니다.
... 생태학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유념해야 되는 사실은 이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만약에 한 종을 박멸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생태계가 변화할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말라리아 때문에 당장 내년에, 다음 달에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내 삶이 이렇다보니 사고의 방향이 자꾸만 한편으로 흐른다 싶기는 한데, 책 읽는 내내 떠오르는 단어 하나는 역시 '고통'이었다. 내 삶을 피폐하게도 만들고 더욱 견고하게도 만드는 '고통' 역시 박멸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통이 없는 나라를 꿈꾸며 내세에는 평화만이 기쁨만이 존재하길 바라지만 그런 세상은 있을 수도, 또 있어서도 안되는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고통을 직면하고 견뎌내고 넘어서야 한다는 심리학적 치유 단계가 정답처럼 있긴 해도 당장 어마어마한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고통의 긍정적 의미'를 아무리 부여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장 너무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당당히 맞서기보다 차라리 조금 떨어져 있는 경우가 더 크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 어떤 정답도 언제 어디서나 정답일 수는 없는 법.
사는 게 참 신기하고 재밌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몸부림치며 벗어나고 싶었던 시간도 있었지만 여전히 삶이란 건 경이롭다.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진화'해 나가는 것,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이유를 조금 더 의미 있게 만들어간다는 거겠지. 물론 내가 꿈꾸는 내 삶의 목적이긴 하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