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었습니다
아이들 캠프하는 곳에 고기와 밥을 가져다 주기 위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5시쯤 도착할 생각으로 출발했는데 210번 프리웨이에서 사고가 두 번이나 있었지요. BIG BEAR LAKE까지 가는 데만 3시간 넘게 걸렸습니다. 생각보다 길이 좁고 굴곡이 심한데다가 늦기 전에 캠프장에 도착하려는 차들이 속도를 내는 바람에 바짝 긴장하여 손이 저리도록 운전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 호수를 만나니 아무리 바쁘고 운전이 피곤해도 잠시 내려야겠다 싶었지요. 그냥 지나치면 너무 아쉬울까봐 정말 잠시만 내려서 구경을 했습니다. 구불구불하기로 유명한 그 산길을 한참 올라와 펼쳐진 호수라니... 5분도 채 머물지 못하고 아쉬움을 뒤로 한채 다시 출발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조금 늦으리라 생각했지요. 그렇게 험한 길이 펼쳐지고, 해저무는 산 속 1000피트 위에서 길을 잃으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레이크에서 한 30분 정도 더 올라가니 포장 도로가 끝이 나고 비포장도로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답고 거대한 관경에 탄성 지르기 바빠, 더 험한 길이 나오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함께 가던 H수녀님도 그저 '최고다'를 반복하며 좋아했지요. 이후에 나타난 길에 비하면... 이건 비단길이었지요. 사진은 커녕 타이어가 고장날까 너무나 걱정이 되어 이후로는 말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서 다녀온 후 며칠은 입술이 부르텄었지요.
겨우겨우 찾아간 캠프장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가꾸어지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 오직 하느님만이 키우신 흔적. 오로지 자신의 모습으로 제각각 자리잡은 자연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지요. 마른 풀에서도 품위가 느껴졌습니다. 너와 내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동등함 같은 것 말입니다.
물도 없는 캠프장이라니... 시설이 아무리 열악하다 해도 마련된 장소에서만 캠프를 했던 나로서는 여전히 낯선 풍경. 하지만 아이들은 잘도 뛰어 놀더군요. 전화도 터지지 않는 곳에서 그야말로 아이들은 광야 체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다른 점은, 불평 불만 없이 마음껏 뛰어논다는 것. 초보에 가까운 운전자인데다, 수녀님인데다, 초행길인데다, 한국사람인데 아이들도 교사들도 제가 고기와 밥을 가져다줄 거라는 데엔 무한한 믿음이 있었나 봅니다. 몇번이나 갈 수 있을까 걱정하던 저에 비해 아이들 표정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기쁨만 가득했지요. 고기 굽는 냄새가 참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여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풍경. 살아나는 것도, 죽어가는 것도, 살고 있는 것도 그저 그것으로 족하고 당연하며 못어울릴 것이 없음을 생각하게 했지요. 사람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자각도요.
저녁도 먹지 못하고 급하게 다시 돌아나와야 했습니다. 몸살이 난 죠앤을 태우고 가야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해가 지기 전에 1000피트나 되는 산을 빙글빙글 돌며 내려가야 했으니까요. 게다가 전화도 구글맵도 ...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싶어 뽑아둔 경로를 의지하여 가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겨갔던 네비를 켰더니 가려던 길과 반대의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나보다 네비가 더 믿음직해 보였습니다. 이후 30여 분. 길을 점점 험해졌고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차 바닥도 떨어져나갔고 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길이 펼쳐졌습니다. 네비가 알려주는 길은 막혀있기까지 했지요. 동승한 수녀님이 하얗게 질려 떨리는 손으로 묵주만 돌리는 모습이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다 느껴졌지요. 저 역시 너무나 막막했습니다. 이러다 큰일 치르는 건 아닌가... 기름도 걱정되고 타이어도 걱정되고 이미 떨어져 덜렁거리는 차 바닥을 끼워가며 운전을 했지요. 웅덩이나 바윗덩이를 타고 넘은 건 이미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지요.
30분은 넘게 가다가 정말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 이상 높이 올라가서는 안된다는 것. 네비가 알려주는 길은 이제 믿지 말고, 나와 당신만을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지요. 누가 봐도 무모한 판단이었지만, 아픈 아이와 미국에 온지 며칠 되지도 않은 친구 수녀님을 책임지기 위해선 누구보다 당신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 좁은 길에서 후진을 하고, 갈림길에서 유턴을 해 다시 길을 더듬어 갔습니다. 현재 위치만 겨우 알려주는 구글맵을 들고 어떻게든 호수까지만 내려가면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해지기 전에는 비포장 도로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몇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아슬아슬한 길을 지나 처음 출발한 캠프장 부근까지 도달했고 그때부터는 무작정 내려가는 길만을 택해 달렸습니다. 30분을 헤매고 되돌아가는데 한 시간 가까이 허비하고 나니 이미 해가 지고 난 후였지요. 하지만 완전히 캄캄해지기 전에 호수에 도달했고 그 이후론 마음 편히 달렸습니다. 캄캄한 밤에 그 구불구불한 길을 만났는데도 그저 감사할 뿐이었지요. 아무리 험한 길이라 해도 이젠 '아는' 길이니까요. 이 길이 어떤 길인지, 어디로 난 길인지 안다는 것은 '험난함'을 충분히 이기고 남았습니다. 우리는 기쁘게 농담까지 해가면서 말입니다.
돌아오는 길, 제 마음을 참 편하게 해준 아이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미국 사람도 아니고, 아빠만큼 운전을 잘하지도 않고, 여자에다 수녀님인 내가 운전하는 차에서, 길을 잃고 밖은 캄캄한 산 속에서 한치의 의심도 품지 않고 쌔근쌔근 잠들어 있던 죠앤 말입니다. 그 믿음이 어디서 왔을까요. 세상의 눈으로라면 말도 안되는 이 상황에서 '수녀님'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전하게 믿고 의지했던 죠앤이 제겐 아주 큰 힘이었습니다. 고맙고 행복했지요. 그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단순하고 순결한 믿음. 신뢰. 의탁. 나에게 당신은 어떤 존재이신가 싶어 뭉클하던 마음이 울적해지고 죄송해지긴 했지만, 제겐 아주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그런 믿음. 그런 의탁.
예... 온전히 말입니다. 전부 다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