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食性 人間

장 바니에의 시보다 아름다운 예수전

하나 뿐인 마음 2015. 7. 21. 09:08

장 바니에 지음. 이현주 옮김. 나무생각.


예수의 간절함 바람(希望)은 사람들을 그들의 가난과 상처와 함께, 그들의 가면과 방어기제를 또한 그 아름다움과 함께,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데 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예수의 추종자로 살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만큼 기쁨을 맛보기도 했고 자유로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힘든 일이기도 했다. 자신의 속물근성과 이중성에 낙심하였고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과 남에게 거절당하고 명예가 더럽혀지고 죄인으로 비난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의 깊은 수렁에 스스로 빠져들었고, 내 가슴의 상처 입기 쉬운 나약함과 허무와 분노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다. 나는 여러 방어기제와 분노와 그 밖의 도피방법으로 상처 입기 쉬운 자신의 나약함을 감싸주려 하였다. 예수의 크신 선(Goodness)을 드러내려고 나는 이 책을 쓴다. 그분은 누구에게도 엄격하거나 가혹하지 않고 남을 지배하거나 남에게 당신 뜻을 강요하지도 않으신다.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주거나 그들을 심판하려고 거기 계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을 움직이는 것은 당신의 사명감이다. 그분은 강하시고 그분 안에는 진리의 빛과 깊은 겸손과 어린아이의 천진한 사랑과 세상에 생명을 주려는 소명과 기다림이 있다. 온유한 연인이자 치유자인 예수께서는 충만한 생명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 각자에게 빛을 비추고자 교만, 두려움, 봉쇄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세상 안팎의 어둠을 조용히 파고드신다.


요한은 그들 모두에게 마음을 바꾸라고 외쳤다. 열심당이 되거나 율법조문을 까다롭게 지키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겉모습을 바꾸라고 하지 않았다. 군인이든, 세리든, 직업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 다만, 속마음이 달라져야 한다고, 마음을 바꾸라고 말했다.


예수의 자비심은 용서의 자비심이다. 많은 사람이 죄의식과 자기가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갇혀서 마음과 영혼이 망가져 하느님을 두려워하였고, 하느님의 율법의 대리인 행세를 하는 이른바 순결한 자들에 의하여 멸시당하고 소외당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저주하고 벌하시는 하느님 아닌 용서하시는 하느님, 참된 사랑과 교제를 그들과 나누고자 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주고자, 그분은 세상에 오셨다.


예수의 마음은 의로운 사람, 거절당한 사람들에게 쏠려 있다. 당신이 바로 거절당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그분은 거절당한 자의 아픔을 이해하신다. 당신 가슴이 부서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부서진 가슴을 너무도 잘 이해하신다. 그들의 아픔은 그분의 아픔이고, 그들의 외로움은 그분의 외로움이고, 그들의 울음은 그분의 울음이다. 가난한 자들, 외로운 자들, 부서진 자들에게 그분의 마음이 끌리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변화되어 새로운 사랑으로 살기보다는 억압과 두려움과 죽음의 세상에서 방어기제와 장벽들 뒤에 숨어 서로 다투면서 사는 쪽으로 더욱 잘 준비되어 있는 듯하다. 끝없는 경쟁과 다툼 속에서 힘과 명예를 얻고자 남들과 싸우며 자기를 과시하는 것이 더 편한 듯하다. 모든 사람, 모든 집안 안에 어둠과 번뇌의 힘 있는 세상이 있고, 새로운 사랑으로 자기를 열지 못하게 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이끌림이 함께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우리 피부에 스며들어 있는 원죄요 근본적인 죄다. 온유하고 따스한 연민과 사랑이 오해받고 거절당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람들은 예수를 원하지 않는다. 어둠에서 해방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랑의 왕국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 예수는 진실을 왜곡하고, 자기네 권력과 영광을 위해서 하느님의 것들을 사용하는 자들에게 분노하신다.


예수가 어떻게 사셨고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이해하려면, 그분의 연민과 분노를 이해하려면, 그분 가슴에 아무 울타리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처럼, 참된 긍휼을 베풀 수 없게 가로막는 울타리, 사랑의 흐름을 차단하는 울타리, 자기와 하느님, 자기와 현실 사이를 갈라놓는 울타리, 자기를 아픔에서 방어해주는 울타리가 그분한테는 없었다.


사회와 가정에서 따돌려지고 버림받아

스스로가 쓸모없는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들과 함께 살면서 

나는 우리 모두가 얼마나 자기를 

고뇌와 외로움, 죄의식, 자기가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생각으로부터 

열심히 자기를 보호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우리 모두, 일을 하고 계획을 세우고 오락시설을 찾아 자기 내면의 허전함을 채우려는 노력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아이의 아픔에서 멀리 도망을 친다.

우리는 잊으려고 애를 쓴다.

자기가 최고임을 증명하려고, 자기가 유식한 엘리트임을 보여주려고

또는 자기가 나쁜 자들의 희생물임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탈을 쓰고서 자기 아닌 어떤 자로 행세하며 칭찬과 명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니면, 깊은 절망에 빠져 심할 경우 자살을 기도한다.


우리 모두 아이였을 때 이런저런 상처를 입는다.

자기가 부모에게 원치 않는 아이인 것을 감각으로 느끼던 날,

부모의 계획을 어긋나게 하거나 그들의 희망을 망가뜨린 자신한테 화가 나던 날,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고통을 경험한다.

부모들이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 

그들은 성가시게 하는 짓을 하면서 우리는 울어댔고 그들은 힘들게 했다.

그때 우리는 너무 어리고 나약하여 상처 입기 쉬운 몸이었으므로 조건 없는 사랑과 이해가 필요했다.

우리는 그때 입은 손상이 우리의 울음을 견딜 수 없던 부모의  피로, 허전함, 내적 고통, 상처들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따라서 우리의 '허물'이 아님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꿈, 계획, 망상들 속으로 도망쳐야 했다.

어린이들이 상처를 입으면 자기를 닫아버리고

표출되지 않은 분노, 저항, 슬픔 뒤에 숨어 의기소침해지거나 아니면 공상의 세계로 도피한다.

이때 입은 손상은 진실한 교제를 갈망하는 여린 가슴을 단도에 찔린 것과도 같다.

그것은 무서운 고독, 내적 고통, 죄의식, 수치심, 분노를 자아낸다.

아이들은 자기가 부모를 실망시키고 그들에게 상처를 입힌다고 생각한다.

어느 아이도 이 내적 고통을 이해하거나 견딜 수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자기 부모를 비판하거나 비난할 수 있는 아이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분노를 뒤로 감추고 자기 자신을 탓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착하지도 않고 사랑스럽지도 않은, 아무 데도 쓸모가 없는 존재로 아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모든 내적 고통으로부터, 

현실, 특히 자기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의 현실로부터, 자신을 차단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드로가 관계 맺는 능력에 손상을 입는다.

결국, 남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성숙하기를 바라기는커녕

오히려 쉽게 그들을 심판하거나 정죄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될수록 멀리 밀어낸다.

그러면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우리는 남들을 지배하거나 이용하려 하고 아니면 그들에게서 멀리 달아나 숨으려 한다.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우리는 속 깊은 곳 망각의 세계에 이 아픔을 감추고그 둘레를 단단한 장벽으로 에워싼다. 

바로 이 어린 시절의 아프고 혼란스러운 경험들의 잊혀진 세계에서

사랑과 교제에 대한 목마름이 상처를 입고, 그로 말미암아 인간관계들이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이 아닌, 

성공과 칭찬을 가져다줄 꿈, 이념, 망상, 논리, 사업계획들 속에서 살려고 한다.

우리 마음을 둘러싼 장벽들은 우리를 아픔에서 지켜줄 만큼 깊고 강하다.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에서 또는 꿈속에서 살아간다.

그리하여 가슴과 머리가 차츰 현실의 '지금(now)'에서,

자기 육신과 감정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를 모든 것의 중심에 둔다.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새들의 노래 또는 아이들 가슴에서 솟아나는 사랑의 하소연을 먹고 자라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특성과 가치를 끝없이 추구하는 데 목마른 자기를 먹고 자란다.

아니면, 좌절과 반항의 뱀 굴에 빠지거나 '내일' 또는 '어제'의 함정에 떨어져

지난날의 상처들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윤리나 도덕, 선하고 악한 행위들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선과 생명을 사랑하는 쪽으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영광과 칭찬을 얻으려 하고 자신의 선과 가치를 증명해 보이려고 애쓰는 동안,

우리 안에 있는 상처들이 우리의 모든 동기들을 오염시킨다.

우리 모두, 안으로 깊게 치유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예수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 아버지이자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애롭고 자비로운 얼굴,

용서하시는 얼굴을 보여주려고 세상에 오셨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하느님에 대한 그릇된 관념들, 분노하고 심판하며, 숨어서 사람을 훔쳐보다가

갑자기 달려들어 벌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하느님,

종교의식과 예배형식, 희생제물, 정결의식,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과 해야 하는 일 때위에

더 많이 관심하는 율법의 하느님, 혹은 인생사와 인간의 고통에 흥미가 없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하느님에 사로잡혀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진짜 얼굴, 사람들을 뜨겁게 관심하시는 사랑의 하느님,

진실의 하느님, 빛의 하느님, 

아무리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자라도 빠짐없이 사랑하고, 사람들 저마다의 아름다움과 추함,

풍요로움과 가난함, 부끄러움과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알아주시는 관용의 하느님,

모든 사람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생명의 하느님,

부유하고 권세 있는 자들 편에 선 율법과 제도를 옹호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을 심판하고 정좌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구원하고 치유하고 생명을 주되 넘치게 주시는 하느님을 보여주려고 세상에 오셨다.


예수가 그들을 부르신 것은,  

당신을 중심하여 다른 많은 남녀 제자들을 핏줄보다 깊은 신앙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서로 보살펴주는 법을 배우고, 각자 자기 자리를 차지하여 받은바 은사를 실현하고,

자기들이 얼마나 깨어져 있고 남을 질투하고 힘을 추구하는 존재인지를 배우고,

서로 용서받고 용서하고 치료하고 치료해줄 필요가 있음을 깨달아 알고,

가난한 이와 불편한 이, 눈 먼 이들에게 자신을 끊임없이 열어주는 법을 배우는 그런 공동체였다.

안전을 위해 폐쇄된 공동체가 아니라,

모두가 자유와 사랑 안에서 성장을 돕고 서로 치유해주는 공동체,

서로를 버텨주고, 존재 자체로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 사랑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을 배출하는 공동체였다.


궁핍과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들에게 손 내밀어 그들과 연대하기를 거절하고,

자기한테 있는 것을 없는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 것은 일종의 죽음이다.


분노와 질투에 휩싸여 절망 속에서 자신의 운명과 하느님과 종교와 예언자들에게 성이 나 있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 또한 예수로 인하여 심사가 불편하였다.

그렇다, 그들은 저항 대신 신뢰를 말하는 예수에게 화가 났다.

손에 무기를 들려주지 않는 예수, 자기네 방식으로 자기들을 편들지 않는 예수를,

그들은 외면하고 나아가 미워하였다.

그렇게 예수는,

자기들 방식에 스스로 갇혀서 방탕하게 살아가며 자기들을 하느님 법에서 잘라내고

사랑과 용서 따위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는 남자와 여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