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보다

선 오브 갓 Son of God

하나 뿐인 마음 2015. 2. 19. 03:17

 

 

사순시기를 준비하면서 함께 반모임을 하는 청년들에게 도움이 되는 영화를 한편 봐야겠다 싶어서 검색하다가 찾아낸 영화. 작년엔가 변호인을 보러 미국 영화관에 갔다가 예고편으로 하는 걸 보긴 봤었는데 그닥 흥행한 영화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성경 내용에 익숙하지 않은 애들이 보기에는 무난하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처럼 수난만을 집중해서 다루지 않고 사도 요한이 회고하는 형식으로 예수의 생애를 전반적으로 다루었으므로 나름 괜찮은 선택이었다.

 

이번 영화를 보면서 새삼 다시 느끼게 되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겪었던 예수와의 경험은 함께 있던 이들 그리고 나아가 우리 모두의 경험이라는 사실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단지 베드로의 경험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활 체험도 그들 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예수님은 모두에게 모든 것이 되셨고,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우리의 스승이요, 구원자로 함께 하실 수 있다. 우리는 '그들처럼' 예수를 만나고 의심하고 믿고 애원하고 모른척하고 죽음으로 몰아가고... 이 모든 것을 겪은 후에 부활한 예수의 손을 다시 잡고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난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평안을 추구하는 사람은 신앙생활도 안락하길 바라고, 타인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사람은 그 역시 무언가에 복종한다. 이익이 목표인 사람은 선행과 희생에도 댓가가 따르길 바라고, 타인의 말을 들지 않는 자는 신의 말에도 귀를 닫고 자신의 말을 하는 법.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장면은 두 가지이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과 성모님이 서로 만나시는 장면인데, 한없이 절규하시던 성모님이 결국은 당신 힘을 다해 넘어진 아들의 십자가를 일으켜주며 예수가 다시 일어서서 그 길을 완성하도록 돕는 장면이다. 요즘 나를 맴도는 말이, "그게 수녀님의 십자가에요."라던 저스틴 학사님의 말인데 서운하게도 들리고 부당하게도 들리던 그 말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아무리 부당하고 그래서 억울한 십자가라고 하더라도 내 어깨에 놓인 것이라면 내가 짊어지고 가야하는 십자가이다. 성모님은 나의 십자가 길에서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시며, 내가 십자가를 다시 짊어질 수 있도록 내 십자가를, 그리고 나를 일으키신다.

 

두 번째 장면은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되는 장면이다. 그저 군중 속에서 이름 없는 사람으로 서 있던 그가, 타당한 이유도 없이 그저 주위에 있었다는 이유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게 된다. 나의 것이 아님이 분명한 십자가를 온 힘을 다해서 붙드는 것이 그분을 돕는 최선의 길이었다. 내 것이 아니다 싶고, 이것을 내가 지고 가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싶어 십자가를 부정하고 싶었지만, 어떤 이유로든 그것은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게 누구의 십자가이건 나에게 다가온 십자가는 결국 나의 십자가요, 부당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나의 십자가 길일 수도 있으리라. 또한, 대신 지는 십자가라고 해서 절대 가볍지 않듯, 타인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들이 감내해야하는 삶의 무게를 절대 가벼이 여기지 말자.

 

며칠 전 운전을 하다가 크게 사고가 날 뻔 했다. 나는 푸른신호를 받아 직진해야 하는 상황이고 택배 차량은 분명 붉은신호를 받고 정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택배 차량은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멈출 마음이 없었고 당연히 푸른신호를 받은 나는(내가 옳았으므로) 큰 의심 없이 그리고 당당하게 멈추지 않고 직진을 했다. 결국 나는 오른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야했고 천만다행으로 사고는 면했지만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나는 무사한 것에 대한 감사보다는 내가 옳았다는 생각과 그가 틀렸다는 생각과 그에 의한 분노에 시달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스스로에게 '내가' 끊임 없이 '내가 맞잖아. 걔가 틀린 거잖아.' 중얼거리며 괴롭혔던 거다. 시비 자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시비를 가리는 것이 모든 것을 완성하는 것도 아니다. 전제 상황에 따라 시비라는 것이 무의미해질 때도 있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나 혼자 '나는 직진했어야 했는데, 걔가 멈췄어야 하는데...'하고 있는 나 자신이 안쓰럽기도 하고 초라해보이기도 했다. 툭하면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시비'. 아무리 내가 옳고 상대가 그른 행동을 했다손 치더라도 일단 사고가 나고 나면 그게 뭔 소용이란 말인가. 보험 문제에는 중요하겠지만, 일처리 과정이나 병원 문제, 치료와 회복 등 끝없이 이어질 상황들을 생각하면 일단 내가 '멈추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거 나한테 너무한 일이야.'라고 혼자 중얼거리던 조그만 소녀가 아직도 내 안에서 아픈 마음을 채 다 씻어내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는 거겠지.

 

사순시기이다. 해마다 걷는 사순시기이지만 매번 결의는 조금씩 다르다. 올해 사순시기에는 '기억하겠다'. 하느님께 바쳤던 수많은 약속을 기억하고, 나 자신의 행복을 기억하겠다. 잊어야 할 것들이 있음을 기억하고, 살기 위해 수시로 떠올려야 하는 은총도 기억하겠다. 예수가 누구인가를, 내가 누구인가를 기억하겠다. 

 

아, 한 장면이 더 있다. 간음한 여인에게 던지기 위해 손에 쥔 돌의 크기와 돌아서며 내려놓은 돌의 크기. 실제로 클로즈업을 해서 그런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들고 있다고 여긴 돌의 무게와 실제로 던져지는 돌의 무게는 사실상 그렇게 다른 건지도. 상대를 향해 돌을 쥔 손. "난 돌을 쥐고 있지 않았어."하고 있지만, 맨주먹마저도 힘주어 무언가를 쥐고 있는 상태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은 가벼운 빨마가지를 흔들었고 그분은 무거운 십자가 나무를 짊어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