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창비.
읽으면 읽을수록 '속았다'라는 생각이 드는 소설. 성석제 작가가 이럴 줄 몰랐고, 김만수가 이럴 줄 몰랐기에 읽으면 읽을수록 산다는 게 이럴 줄도 정말 몰랐다 싶었던 억울함 같은 게 스멀스멀 올라왔다.
네가 형을 대신하여 집안을 지켜야 한다. 비 새는 천장, 연기 솟는 방바닥 같은 네 부모를 떠받치고 수숫대 담벼락과 같은 형제를 이끌어줘야 한다. 형이 없는 빈자리를 채울 사람은 만수야, 오로지 너 뿐이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풍비박산해가는 나라와 가족 틈바구니에서 진심 하나로 맑디 맑게 살아가다가 결국 투명해져버리는 이야기. 사라진 것이 아니라 너무 맑아서 점점 투명해져버린 사람, 김만수. 이 사람 앞에 서면 그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맑은 물에 내 얼굴이 비치듯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세파의 얼룩이 비칠 듯하고, 내가 미처 보지 못했거나 나 살아가는 데 바빠서 애써 외면했던 얼굴들이 그의 뒤에서 편안하게 숨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 같았다.
문제는 연탄이었다. 방의 호수별로 구역을 표시하고 들여놓은 연탄을 쌓아놨는데 슬그머니 한두 장씩 없어지는 일이 잦으니까 매일 숫자를 세어보게 되고 서로를 감시하면서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그러니 가난하고 가진 게 없는 사람들끼리 싸울 일이 더 많은 거였다. 연탄을 우리에게 팔아먹고 돈 많이 벌고 세금 많이 걷고 영원히 부와 권력을 물려주고 물려받을 인간들하고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쳐다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비슷한 처지의 인간들끼리 머리 뜯고 대가리 깨지고 피 흘리며 싸우고 또 싸우는 것이었다.
아름답고 뜨거운 마음을 지녔던 벗들은 이 누차하고 타락한 세상에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느낀다.
나에게 서울은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좁아터진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복닥거리면서 아귀다툼을 벌이는 데가 서울이었다. 없는 놈들끼리 더 훔치고 못살수록 더 싸우고 서로 안된 처지에 서로를 욕하고 아프고 주리고 외롭고 힘들게 살았다. 서울은 무식한 내게도 너무도 노골적으로 느껴지도록 '물질이 주인인 세상'이었다.
투명인간에 나오는 세상은 그리 멀지 않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현재까지 지속되는 진행형의 내 나라 사정이다. 억울해서 분통이 터져도 모라잘 판에 애먼 이들이 바락바락 제 살 깎아먹으며, 돈 많고 머리 좋으면서 나쁜짓만 일삼는 사람들의 분탕질에 속아 보듬어 안아야할 사람들끼리 싸움을 벌이는 안타까운 세상. 그게 지금 이 나라이고, 누차하고 타락한 세상이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는 누군가의 말이 '빈말'처럼 들리는 세상. 하지만 제아무리 흙탕물이라고 해도 먼지와 물은 구별되는 법. 모든 게 가라앉고 나면 맑은 물이 모습을 드러내듯, 각고의 인내로 견뎌낸 그는 맑은 물이 드러나듯 투명한 자신을 드러낸 거였다. 평생 나 자신의 가면과 싸워야 하는 나로서는 투명함이 존재의 '부재'가 아니라 '현존'으로 다가온다.
낱낱인 사람들을 단결시켜 '우리'로 만든 사람이 김만수였다.
어제 더 이상 상처받을 수 없어 포기하겠다는 어느 신부님의 글에 울컥했었다. 나 역시 이젠 정말 마음 주지 않겠다 하며 조용히, 차분하게 다 내려놓아야겠다는 아픈 결심을 내렸기 때문에 더 울컥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신부님이나 나나 결국은 내 목소리보다 더 슬픈 그분 목소리 때문에 다시 시작할 것을 알기에 더 짠했다고나 할까.
내가 맑은 물이라 해서 흐르다 만나게 되는 물이 모두 맑은 것은 아니다. 내 가는 길에 뛰어드는 것들 역시 깨끗한 녀석들만일 리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굳이 맑아야 할 필요는 없다 말하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고, 내 인생을 맑게 유지하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더더욱 말도 안되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가끔은,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리 맑은 물도 아니면서 말이다.
... 내 주위에 이런 사람이 살고 있다면 나는 그를 어떻게 대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