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ta contemplativa

Christmas Wreath

하나 뿐인 마음 2013. 12. 20. 09:18

 

  성탄절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이 Christmas Wreath이다. 사춘기가 늦었던 나는 엄마랑 단 둘이 살면서도 고3 시절, 독서실로 달려가 공부를 하곤 했다. 입시가 막바지에 이르러 학력고사 스트레스가 최고조이던 어느 날, 늦은 밤 독서실을 나와 집으로 왔는데 내방 창가에 Christmas Wreath가 달려 있었다. 우리집은 골목처럼 들어간 곳에, 약간 높은 곳에 특이한 방식으로 지어진 집이라 대문으로 들어서는 그 짧은 골목 끝에 서 있어도 우리집이 아득하게 멀리, 높아 보이는 집이었다. 밖에서 가장 잘 보이는 창문에 엄마가 걸어둔 때이른 Christmas Wreath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난 무거운 가방을 맨 채로 골목 끝에 한동안 서 있었다.

 

  난 엄마와 다른 성격이었다. 에니어그램도 4유형이긴 하지만 아버지 성격인 5유형 날개만 사용하는 편향적 4유형이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나를 5유형이라 단정하기도 한다.) 엄마는 아기자기하게 꾸미는 것을 좋아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엄마는 나를 위해 인형이나 소꿉놀이 같은 걸 사줬지만 나는 그걸 진열장에 넣어두었고 인형놀이나 소꿉놀이에는 쉽게 지쳤다. 해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장식을 했던것 같긴 한데 자잘한 기억이 없는걸 보면 트리 장식 같은 것에도 시큰둥했을 게 분명하다.

 

  그날의 그 Christmas Wreath가 생소하게 다가왔던 것은 그전까지는 집안에서만 아기자기하게 꾸몄던 엄마가 그해 처음으로 때이른 성탄장식을, 그것도 Christmas Wreath만 그렇게 밖에서 볼 수 있도록 창문 밖에 걸어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기억은 사실, 잠깐 멈추어 바라보았던 것밖에 없다. 예쁘다고 느꼈었을까? ... 모르겠다. 캄캄한 밤에 혼자만 알록달록 빛나던 Christmas Wreath 덕분에 잠시 지친 나를 잊을 수는 있었던 것 같다. 그 당시의 나는 공부의 압박보다는 그동안 너무 많이 놀았던 탓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음을 절감하며 나 자신에 대해 화가 많이 나 있었는데, '아...'하며 나 자신을 아주 잠시 놓아주었었던 기억은 있다.

 

  엄마는 그해 성탄절을 마지막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그 Christmas Wreath는 엄마의 처음이자 마지막 Christmas Wreath였던 것이다. 다음해 성탄절, 엄마 없이 혼자 성당에 가서 자정 미사를 한 후 친구들과 헤어져 늦은 밤 혼자 집으로 돌아가면서 알게 되었다, 엄마의 마지막 성탄절을. 이제는 20년을 살았던 그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엄마가 꾸민 크리스마스 장식을 볼 수도 없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몇 년 후에 어느 성탄절 즈음 나는 어슴푸레 그 Christmas Wreath를 다시 떠올렸고, 어쩌면 늦은 밤 공부에 지쳐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위해 때 이른 Christmas Wreath를 골목에서부터 볼 수 있도록 걸어놓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는 엄마다운 방식으로 때늦은 사춘기와 고3 병을 함께 앓고 있던 나를 반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날 내가 엄마에게 Christmas Wreath가 예쁘다고 말을 했었던가. 어렸을 때부터 말이 적었던 내가 불만이었던 엄마에게 그날이라고 그런 말을 다정하게 했을 리가 없다. 엄마의 마지막 성탄절은 너무 외로웠던 건 아닌가 싶어 나는 20년 째 후회를 하고 성탄절을 맞는다.

 

  미국에 오니 Christmas Wreath가 너무 많고 너무 예쁘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더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