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부르심따라

그릇이 들려주는 이야기

하나 뿐인 마음 2013. 6. 26. 16:54


피정을 준비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피정 주제로 뽑는 성경 구절도 그렇고, 내가 선택하는 복음이라든가, 하다못해 음악도 그렇다. 내 머리는 피정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준비를 하고 있지만, 지금의 내 영혼 상태가 어떤지도 피정 준비를 하면서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늘 피정을 여는 프로그램으로 선택하는 "그릇이 들려주는 이야기". 사람들의 입을 여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그릇들을 준비하기 위해 나는 피정을 앞둔 일주일 전부터 주위에 있는 그릇들을 눈여겨 보게 된다. 제의방 꽃꽂이에 쓰이는 화기들, 수녀원 화기나 그릇들, 성당 주방에 있는 그릇들... 하지만 이번엔 그릇들이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종류별로 몇 개를 고르긴 했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그릇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마지막엔 학사님 숙소까지 뒤져서 그릇을 찾아다녔다. 어쩌면 그릇을 찾았다기 보다 필사코 나 자신을 찾아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피정에서는 굳이 그릇을 망치로 두들겨 패서 산산조각을 내어 쓰기도 하고 장식 하나 없는 장독 뚜껑이나 손가락 두 개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작은 스트레이트 양주잔을 고르기도 한다. 이번에 마지막으로 고른 그릇은 일회용 종이접시... 일회용 접시를 한참 들여다보며 채워지지 않고 소모되기만 하는 내 감정을 생각했다. 내 감정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길래 이제 되었구나 싶어 피정 장소에 미리 세팅을 시작했는데 도무지 '각'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릇들도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고 배치를 아무리 바꿔봐도 뭔가가 허전했다. 피정 당일 아침까지 그릇의 위치와 장식천까지 다시 바꾸어 봤지만... 컵초들을 배열하고 불까지 붙였는데도 여전히 뭔가가 허전했다. 내 마음처럼...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


청년들이 모일 시간이 다 되어서야 나는 포기란 걸 할 수 있었다. 실은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정성껏 준비한듯 보이는 피정 세팅을 마치고 음악을 틀고 돌아서는데, 그제서야 눈에 들어오는 하나의 화기. 금색을 좋아하는 편이라 별 생각없이 골랐었는데, 너무나 가벼운 플라스틱인데다 반듯반듯한 줄무늬도 내 취향이 아니고 굴곡 하나 없는 밝고 가벼운 금색이라니... 게다가 좁지도 넓지도 않은 주둥이까지. 그런데 그게 조용히 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그 가볍디 가벼운 어정쩡한 황금색 꽃병을 가만히 툭, 쳐서 눕혀 버렸다. 어디에 놓아도 어울리지도 않을것처럼 보여 꿔다놓은 보릿자루 마냥 가장자리에 대충 세워뒀던 그 녀석을 눕히고 나니 그제서야 요며칠 절대 내뱉지 못하고 폐 안 깊숙이 낑낑 붙들어두었던 한 주먹 만큼의 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휴-


잘해보려고 너무 애썼나보다. 아니, 바꾸어보려고 지나치게 발버둥쳤나 보다. 방법을 몰라 답답한 마음에 그동안 어쨌거나 버티고 서 있어야지 싶었나 보다. 그 어느곳도 내 자리가 아닌듯 싶어 마음 둘곳 찾지 못한 채 기댈 곳도, 햇빛을 피할 곳도 없다 싶은 장소에 홀로. 화병 하나 눕혀놓고 나자 마음이 편해진다는 게 참 우스운 일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내가 그랬다. 체한 것처럼 내 폐 한 구석을 차지했던 그 한 줌의 숨이 그제서야 나를 떠나가고 나는 스스로에게 '좀 쉬어도 돼. 당분간 멈춰도 돼.'하며 다정히 말을 건네게 되었다.


그래, 좀 쉬자. 멈추자. 기댈 곳이 없다고 버티고 서 있지 않아도 된다. 그냥 그 자리에 누워서 하늘을 보면 된다... 그래, 좀 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