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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1/05 (13)
깊이에의 강요
여름이 가까우니 끝기도까지 마쳤는데도 아직 세상이 환하다. 어둠이 내리고 밤이 가까울수록 수도자는 혼자로 되돌아간다. 홀로임을 온 감각으로 깨달으며 그분께로만 가야하는 시공간 속으로.
곧 어두워질테고 조금 피곤하기도 해서 중정을 몇 바퀴 돌았다. 이십 년 넘도록 지켜본 중정의 식물들. 중정 안에서만 보이는 하늘. 오늘따라 남천이 너무 예뻐서 그만 하나 슬쩍 데려와 내 방 앞 커튼에 붙였다. 안에 불을 켜 두고 어두운 복도에 서니 너무 예쁘더라. 내 안에 불을 밝히면, 그래, 더 아름다워지지.
매리 다니엘 수녀님의 장례 미사. 성체를 모신 후 수련소 때부터 전통처럼 늘 부르던 시편23편을 불러드렸다. 한 수녀님이 녹음을 해주셨고, 소리가 좀 작긴 하지만 한 번만 듣기는 아까워 찍어둔 사진들로 동영상을 만들어 두자 싶었다.
은소홀 지음. 노인경 그림. 문학동네. ‘적당히’를 알아가는 여성 아동의 성장 이야기. ‘적당하다’는 말은 ‘정도에 알맞다’라는 뜻이다. 길게 보면 인생의 많은 일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 같지만, 그 수많은 일들이 순서대로 오진 않았다. 내게 은 한꺼 번에 닥쳐오는 수많은 일들과 우후죽순처럼 자라나는 마음 속 감정들 속에서 ‘적당히’를 배우는 이야기였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도 ‘적당하게’ 하는 일이고 그만 마음을 접고 멈출 줄 아는 것도 ‘적당하게’ 하는 일이란 걸 나는 언제쯤 알기 시작했을까. ‘적당히’가 덤비지도 않고 쉽게 포기하지도 않는 ‘중간’이 아니란 걸, 솔직하게 덤벼도 보고 솔직하게 피해도 본 후 온 몸으로 배워낸 나루가 너무 멋있었다. p.97 "나루는 그런 태양이를 보면서 과학자도 ..
손원평 지음. 창비. 편도체에 문제가 있으면 왜 괴물이 되리라고만 여겼는지... 사회적 연대와 개인적 공감과 노력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 준 책. p.84 "처음에 경민이를 좋아하게 되었던 때처럼 있는 그대로 흐르게 두면 돼. 둘의 관계가 망가진 것은 한쪽이, 정확히는 내가, 안간힘을 써야 했을 때부터였으니까. "
정세랑 지음. 난다. 세상을, 우리를 지탱하는 힘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하는 일, 지켜가는 일, 관계 맺는 일,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자세... 가 외계인씩이나 되어야 할 일이었던가. 어떤 현실에서는 외계에서 와야할 만큼 요원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또 어떤 현실에서는 굳이 외계인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 그리고 그 일은 ‘내’가 해야 한다.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또 한번 느꼈다, 이 작가는 정말 사람을, 세상을 사랑하는구나. 무덤함과 무심함에 대해, 예의 있는 사랑에 대해 곱씹어 본 소설. p.84 "처음에 경민이를 좋아하게 되었던 때처럼 있는 그대로 흐르게 두면 돼. 둘의 관계가 망가진 것은 한쪽이, 정확히는 내가, 안간힘을 써야 했을 때부터..
루리 글, 그림. 문학동네. 생각이 자꾸 많아지는 시간을 지나가던 어느 날 이 책을 읽었고,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라는 문장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날은 비가 참 많이도 왔다. 오래된 스타렉스는 비가 많이 오는 날엔 사이드미러도 백미러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번져 있고 뿌연 상태. 힘차게 와이퍼를 움직여야만 겨우 앞이 보이는데 내가 가야 할 길의 경계를 그어주는 차선은 여전히 희미하다. 눈 앞의 것만 겨우 알아보면서 가는 길에선 앞차의 불빛마저 희미하다, 한참을 울면서 보내는 날엔 많은 기억들이 희미한 것처럼. 차선을 변경하고 싶어도 사이드미러와 백미러 모두 보이지 않으면 두려움에 선뜻 핸들을 꺾지 못..
김초엽, 김원영 지음. 사계절. 이 책과 근래에 읽은 몇 권의 책들은 내가 그동안 얼마나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해 왔는지 또 한 번 깨우쳐줬다. 읽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덕분에 ‘조금 알게 된 사람’인 척이 아니라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고백할 줄 아는 사람 정도는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를 읽으며 그동안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자립’에 관한 이야기, 소록도 이야기가 자꾸만 생각났다. 소록도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신 분들 덕에 수십 년 동안 그들은 따뜻하게 도움을 받으며 살았지만 그 따뜻한 보호을 받는 동안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소록도에 갇혀 있었고 그곳에서 빠져나와 세상에 흡수되어 어울려 살아가는 일은 그만큼 더 늦춰졌다는 사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움과 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