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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1/04 (17)
깊이에의 강요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2,46) 빛으로 오신 분은 나의 내면까지 밝히고 따뜻하게 채우는 빛. 24시간 억지로 불을 켜서 오히려 공허하게 만드는 빛이나 주위와 상관 없이 지나치게 밝아 오히려 나를 어둡게 하는 빛 말고. 세상의 수많은 빛 중에서 진짜 빛. 진짜 그분.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오늘 묵상 시간에는 ‘높지 않다’라는 말에 머물렀다, 높지 않다 해서 우리를 낮게 보시지도 않는 분과 함께. 발을 씻어주시는 주인과 살면서도 종들끼리 서로 높낮이를 따지다가 불행에 빠지는 게 인간들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이들이 어쩌면 나조차도 ‘남이 알아주는 높은 자리’에 묶여서 살아간다. 높지 않으니 낮다고 여기며, 높아지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는 것처럼. 요즘은 라일락과 불두화, 서양산사나무 사이에 주차를 한다. 향이 거의 없는 불두화도 향도 크기도 작은 서양산사도 향이 짙은 라일락도 나란히 서서 꿋꿋이 제 삶을 산다. 바람 잘 날 없는 본당에서 투닥거리다가 수녀원..
발등이 부러진 채로 본원으로 이사를 했고, 준양호동에 머물면서 출퇴근을 했었다. 아프고 불편하고 혼자 괜히 서러웠던 순간들이 많았었다. 하지만 나를 주저앉히는 감정들 못지 않게 나를 사로잡던 감사, 위로, 응원... 언제 그랬냐 싶게 나는 두 발로 잘 걷고 있고 출퇴근하느라 하루가 빠듯하고 되찾아가는 일상의 고단함으로 지친 표정이 되기 일쑤지만, 더 늦지 않게 새겨두고 싶은 기억들. 그날그날 짧게 적어 둔 메모들을 모았다. 오래오래 간직한 채로 살아가야 해, 갚아가며 나눠가며... - 동기 수녀는 출근이나 퇴근 길에 들러 간식을 주고 가고, 함께 살았던 언니 수녀님은 내가 밥을 다 먹으면 부리나케 와서 그릇을 챙겨간다. 할머니 수녀님은 물을 떠다 주시고 도서관 수녀님은 내 이름으로 대출 기록을 적으시고 ..
+ 하느님을 힘으로… 사랑하는 레오야, 이제 곧 예수님의 몸을 모시는 첫영성체를 하게 되는구나. 평생 처음으로 예수님을 너의 마음 속에 모시는 날, 깨끗하고 착하고 바른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단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몸 속에, 마음 속에 한 번 들어가신 이후에는 아무리 우리가 예수님과 멀어지고 싶어도 멀어질 수가 없단다. 레오 안에 자리를 잡으신 예수님은 이제 영원히 너를 떠나지 않으시기 때문이지. 다만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예수님이 자신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가끔씩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한 번도 우리를 떠나가시지 않아. 레오가 이 사실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영원히 예수님과 함께 은총 넘치는 삶을 살아가길, 예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 레오를 은총으로 보살펴 주시고 착한 마음을 품고..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요한 6,68) #dailyreading 이렇게 무겁고 아픈 말이었나 싶은 요즘. 요며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이냐시오와 연결된다. 그래, 질문이 아니라 다짐일지도 모르겠다. 떠나겠냐는 스승의 질문에 대답한 베드로의 이 말의 무게를 짐작해 본다. 스승을 안심시키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다그치는 말이었을지도... 아프지만 나도 나의 형제 이냐시오도 종내 이 기도를 바쳐야 하겠지, 청원이 아니라 서원으로. 울지 않고 웃으며 기도할 수 있기를. 형제여, 그대가 이 기도를 바칠 때 나도 기도할 수 있기를, 내가 이 기도를 바칠 때 부디 나와 함께 기도해 주길...
휘리 그림책. 오후의소묘. 조금 울었다. 인형을 꼬옥 붙든 채 눈을 감은 아이. 휘몰아치듯 아이를 감싸는 것들이 아무리 아름답고 눈부시다 해도 아이는 홀로이다. 인형과 함께이나 홀로인 아이. 그래서 울었다. 자그마한 아이가 문을 뒤로 한 채 나아가야 할 세상을 마주했을 때 조금 더 울어주고 싶었다, 아이를 위해. 세상에 홀로 남았을 때의 나를 떠올리며, 홀로 병고 중에 십자가를 향해 걷고 있는 내 형제 수녀를 떠올리며. 나와 한날 한시에 수도생활을 시작한 나의 형제는 멀고 가난한 나라에 선교를 갔는데 며칠 전 확진 소식을 들었다. 벌써 폐렴까지 왔는데 신장도 좋지 않다고 했다. 기도 중에 형제를 향해 중얼거렸었다, 형제여, 예수님 발치까지 갔구나... 더 멀리 가지 말고 이제 그만 되돌아오라고 말하고 싶..
치쁘리아누스 지음. 이형우 옮김. 분도출판사. 틈틈이 주님의 기도에 관한 책을 읽기로 했고, 이번엔 치프리아누스. 를 대출하러 도서관에 갔고 사서 수녀님 덕에 오래된 이 교부 문헌 총서를 빌리게 되었다. 이번 책은 우리가, 그리고 내가 ‘주님의 기도’를 기도한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에 대해 오래 묵상하게 해주었다. 책과 이 책이 전해져 내려온 1800여년의 시간의 깊이, 그때도 지금도 더 진실되게 기도하고 싶어하는 이의 신실함과 지치지 않고 열리길 고대한 인간에게 조금씩 열리는 문과 그 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우리 성당에는 신심 깊은 어르신들이 많은데, 그 중 하늘이 할머니는 늘 이른 시간에 성당에 오셔서 신자들 모두를 위해 제대 구석구석을 엎드려 닦으신 후 바닥에 앉으셔서 오랫동안 기도를 하신다. ..
친구들, 지난 한 주간 동안 잘 지냈나요? 부활절 보물찾기를 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부활 제3주일이에요. 요즘은 온 세상이 푸릇푸릇 싹이 돋고 꽃도 피고 여기저기 녹음이 우거져서 ‘생명’의 힘을 눈으로 볼 수 있지요. 성당이나 집에서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주위를 둘러보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생명의 힘으로 우리를, 또 세상을 살리고 계심을 보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또 믿고 있지만, 처음에,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금방 믿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오히려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했어요. 자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