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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마르 1,14-20 본문
부르심에 관한 대표적인 복음이다. 저번 주의 요한복음에 이어 오늘은 새로운 형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고 계시며 광야에서 유혹 받으신 후 처음 일어난 일들을 다룬다.
장소는 갈릴래아인데-특히 호숫가- 이곳은 예수님께서 자라신 곳(갈릴래아 나자렛 1,9)이며 활발히 전도하신 곳이며(1,39)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을 만나실 장소(14,28; 16,7)이다. 갈릴래아는 시작의 장소요, 삶의 터전이며 새로운 출발의 장소이다.
등장인물은 예수님, 시몬과 동생 안드레아, 야고보와 동생 요한, 제베대오와 삯꾼들이다. 언급되는 인물로는 세례자 요한이 있다. 요한은 언제나 그렇듯 앞부분에 나왔다가 사라지는데, 혼란하고 좌절할 수 있는 상황(잡혔으므로)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등장을 이끌어내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역시나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요한이다. 어둠 속에서 빛이 솟아오르는 장면이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입니다.”(이사 9,1)창세기의 첫 부분(창세 1,1-3 참조)도 떠올리게 한다. 제베대오는 한번도 성서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일이 없다. 오직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로만 소개되는 그의 이름은 성서에서 12번이나 나옴으로써 형체 없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의 두 아들은 복음서 곳곳에서 부모의 영향을 받곤 한다. 어머니의 치맛바람은 아주 유명(?)하다(마태 20,20 참조). 성서는 이 형제를 ‘천둥의 아들’(마르 3,17)인 다혈질로 소개하는데(루가 9,54 참조)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삯꾼에 대해서는 좀더 후에 다룰 것이다.
본문은 크게 14-15절과 16-20절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두 번째 부분을 나누었는데 그러고 나니 첫 번째 부분도 맞아떨어졌다. 정리해보면,
서두(전체상황) |
14-15ㄱ |
|||
A |
B |
C |
||
상황(보시고) |
15ㄴ |
16 |
19 |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초대(부르시고) |
15ㄷ |
17 |
20ㄱ |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응답(따랐다) |
? |
18 |
20ㄴ |
이 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상황→초대→응답’의 과정이 3번 나오고 A의 응답은 비어있다. B와 C는 제자의 예를 든 것이고 A는 우리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 하겠다. 즉 우리의 응답은 열려있으며 각자의 응답에 따라 복음서는 채워진다.
상황
개인의 상황은 각각 다르다. 시몬과 안드레아는 ‘그물을 던지고’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러나 전체상황은 동일하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상황(15절)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각기 다르고 비록 어둠처럼(‘요한이 잡힌 뒤에’) 느껴지더라도 그것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상황인 것이다. 이 둘은 갈릴래아 호수에 있고 배 위에 있다. 16절에 ‘배’라는 단어가 직접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그물을 던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있어야 한다. ‘배’라는 단어는 노아의 방주(창세 6,14)와 모세의 왕골 상자(탈출 2,3)를 떠올리게 한다. 갈릴래아 호수는 바다에 버금가는 엄청난 크기의 호수이다. 우린 흔히 바다에 떠있다고 하지만 배 없이 바다에 떠있을 순 없다. 배는 물 위를 감돌고 있는 하느님의 영(창세 1,2)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위기의 상황이 아니라 구원의 상황에 있다. 우리 역시 혼란한 세상사에 얽혀있지만 무방비상태로 던져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린 이런 진실에 무감각할 때가 많다. 나 역시도...
초대
셩령께서 마련하신 사십 일간의 유혹 이후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행위는 기적이 아니라 복음선포와 부르심이었다. “따라오너라.”하며 제자들을 초대하셨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하고 나를 초대하신다. 예수님은 모두를 부르신다. 각자의 부름이 다르긴 하지만 모두를 구원으로 부르신다. 나는 제자의 길로 부르셨고 그 길을 걷고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에게 맞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감지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가만히 있을 때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을 때 부르신다. 갈릴래아(일터, 삶의 터전, 일상)에서 우리를 부르신다.
응답
초대를 받은 이들은 ‘버림’을 수반한 추종으로써 응답했다. 우리 수도자들은 재물과 이성적 사랑과 자신의 의지를 버림으로써 즉,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삶으로써 응답하는 삶을 살아간다. 제자들도 각자 처한 상황에서 무언가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물’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사람이 직접 고기를 낚을 수 없을 때 또는 한꺼번에 많이 낚기 위해 그물을 던진다. 그물은 곧 무엇인가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나 행위 자체를 의미하겠다. 시몬형제는 그물은 던지고 있었다. 자신이 목표한 것을 얻기 위해 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들이 버린 것은 다름 아닌 그물, 행위 자체였다. 예수님이 그들의 목표(가치)를 바꾸어 주셨기에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들은 이전의 목표를 향한 행위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우린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새로운 가치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행위는 아직도 큰 변화가 없는 듯 하다. 화나면 화내고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이 정도라면 다행이겠지만 가치를 ‘예수님’이라 해놓고는 행동은 ‘세상’을 향해 있기가 일쑤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물’을 버리듯 이전의 행동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야고보 형제는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곧 이전의 것을 마무리하고 다음 행위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 ‘행위 이전의 작업’을 하고 있는 이들은 그물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즉, 행위 자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들을 버려두어야 했다. 아버지 제베대오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형체 없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들의 무의식적인 감정을 지배하고 있는 과거의 기억들, 특히 성숙한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처럼 행동하도록 지배하는 것들을 뜻한다고 보겠다. 물론 부정적인 것들만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주로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 아버지라는 단어는 얼마 전 나의 인식작업을 떠올리게 했다. 내 과거의 장면들 거의를 차지하는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이 세상에서는 다시 되찾을 수 없다는 절망과 부정적인 기억들이 뒤섞여 나를 지배했었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왜곡된 내 행동들. 이제 겨우 조금 틈을 벌려놓고 숨을 쉬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작업과 치유가 있어야할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 나를 불러주신다. 그들은 ‘삯꾼’들도 버려두었다. 삯꾼은 영어로 하면 hired men이다. 즉 내 필요에 의해서 내가 고용한 사람들이다. 내 필요에 의해 내가 고용한 수많은 방어기제들. 합리화, 투사... 행위 이전의 작업을 하던 그들은 모든 방어기제들을 놓고, 자신을 강하게 지배하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놓여나야 했다.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들을 버려두어야 했다.
버려두다leave는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무의식적 감정과 욕구들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더 이상 내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나도 내 과거, 아픈 기억들, 왜곡된 상처들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 발치에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냥 둔 채 예수님을 따라나선다. 없는 척하지 않고 그냥 이대로 예수님 따라 가는 것이다. 나의 상황은 어둠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응답이다.
이번 묵상에는 크게 와 닿지 않았지만 ‘곧바로’라는 단어도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단어이다. 행위를 하고 있던 시몬 형제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했다. 자신의 가치와 목적을 예수님의 가치와 목적으로 지체 없이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와 좀 다르게 행위를 시작하기 전 무의식 단계의 야고보 형제들에겐 예수님 편에서 ‘곧바로’ 부르신다. 행위로 굳어지기 전에 쉽게 말해 저지르기 전에 부르시는 것이다. 제때에 행해지는 ‘곧바로’ 역시 예수님의 섭리일 것이다.
내게 활짝 열려진 응답의 빈칸을 메워가는 이 삶. 내가 ‘곧바로’ 따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주님이 ‘곧바로’ 부르시기도 하는 이 하루하루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 내 응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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