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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본문
김서령 지음. 푸른역사.
김서령이 남긴 ‘조선 엄마의 레시피’
스스로 조금은 어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중얼거리면서 연신 입맛 다셔가며 읽은 책. 나 역시 경상도 출신이기도 하고 지천명에도 들어섰으니 이 말맛, 글맛을 조금은 즐길 수 있었다.
필자가 엄마를 얘기할 때마다 나는 어릴 적 엄마의 부엌을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콩국수가 먹고 싶으면 부엌에서 말없이 도자기 절구를 끌어 안고 국수가 먹고 싶으면 다락에 올라가 국수 빼는 기계 박스를 만지작 거리던 아이였는데, 이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벽 기도 전에 콩을 불려 놓는 수고도 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나만의 부엌은 가질 수 없는 삶이지만, 부엌 일에 나의 기도 지향을 두고 마음도 쏟을 줄 아는 삶은 살고 있다. 찹쌀을 불리고 나물을 다듬는 데에도 기도가 필요하다 여겼던 시절을 지나, 손끝으로 바치는 기도도 나의 기도가 되어간다. 점점.
읽는 동안은 엄두도 못내다가, 책을 덮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질투가 올라왔다. 정말 글이 탐났다. 이렇게 쓰고 이렇게 품고 이렇게 풀어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p.17
"아픔은 사람을 사무치게 만든다. 그리고 사무침은 사람을 의연하게 만든다. 그래서 임하의 아이들은 열 살만 넘으면 대개 의젓해졌다. 그 의젓함은 특히 여자들이 더했다. 어른 중에도 간혹 자발없고 참을성 없는 이들이 있긴 했다. 누가 무슨 일에 울고 짜고 요란을 떨면 "쯔쯔! 생속이라 그렇지!"라며 바야흐로 속이 익어가는 과정을 가엾게 여겼다. 생속이란 아픔에 대한 내성이 부족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생속의 반대말은 썩은속이었다. 속이 썩어야 세상에 관대해질 수 있었다. 산다는 건 결국 속이 썩는 것이고 얼마간 세상을 살고 난 후엔 절로 속이 썩어 내성이 생기면서 의젓해지는 법이라고 배추적을 먹는 사람들은 의심 없이 믿었던 것 같다."
p.30
"이기심과 탐욕과 분노와 공포 같은 걸로 흐려진 인간성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선하고 고운 그 무엇, 썩은 감자 속에서 길어 올리는 매끄러운 녹말 같은 그 무엇, 어쩌면 인(仁)이거나 사랑이거나 자비라도 불러도 좋을 그 무엇, 바로 그것을 대면할 수 있는 가장 가깝고 너그러운 장소가 저 산꼭대기 선방이나 성균관의 명륜당이 아니라 부엌이라고 나는 확실히 믿는다."
p.61
"일단 늙기만 하면 호박은 곡식과 비슷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채소가 곡물의 단계로 격상한 것이니 그건 단연 시간의 힘이었다. 긴 시간 땅기운을 빨아들였기에 품은 기운이 야물었고 저장이 가능했고 끼니가 될 수 있었다(애호박과 늙은 호박을 비교하면 곡식과 채소의 차이가 명료해진다)."
p.145
"정성, 거기에 대해 나는 할 말이 너무도 많아졌다. 젊어서는 주변에 널려 있는 하염없는 정성들을 비웃었다. 나는 남들에게 저렇듯 헛된 정성을 바치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까지 했다. 나이든 지금은 우습게도 정반대가 되었다. 인간이 제 안에서 뽑아낼 수 있는 최대 가치는 정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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