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라
안젤름 그륀 지음. 김선태 옮김. 생활성서.
수련소 시절 이 책을 읽었는데 20여 년이 흘러 다시 읽으니, 안젤름 그륀 신부님의 책이 신드롬처럼 번지던 그때가 생각났다. 더불어 내 안에서 일던 저항감도 함께. 다행인 것은 그동안 내가 좀 더 여물었는지, 택할 것은 잘 택하고 덜 영향을 받아도 된다 싶은 것은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취사선택에 있어서 마음이 자유롭다.
cpe도 하고 있고, 알랭 드 보통의 책(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과 연달아 읽어서이겠지만 요 몇달 간 어린 시절을 많이 생각했다. 잊고 사는가 싶어 가끔 미안하던 부모님 생각도 많이 하고, 그러다보니 부모님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가 싶기도 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좋았던 것은, 나를 돌아보며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놓아주는 과정보다(책을 읽으며 반복했던 이 과정도 정말 좋았다),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놓아버리면 놓아버릴수록 나와 하느님은 더 가까워졌다. 하느님이 내 삶에 어떤 분이신가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꾸만 떠오르는 한 단어, '충분합니다.'. 언니 집에 와서 언니와 형부와 조카들을 보면서도, 다들 출근하고 텅 빈 집에서 혼자 남아 있을 때도 '충분하다'는 생각에 내 삶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하느님 아버지, 저는 정말 충분합니다.
p.11
"우리가 어린이로서 상처를 입는다면, 이것을 막을 길이 전혀 없다. 어렸을 때 우리에게는 상처에 저항하고, 상처에서 벗어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옛 상처들을 샅샅이 뒤지면서 나에게 새롭게 상처를 입히는지, 아니면 나의 상처들과 화해하고 그 상처에서 벗어나는지는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물론 옛 상처들과 결별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치유 과정에서 옛 상처들을 다시 의식적으로 바라보고, 억압해두었던 그 고통을 다시 허용하는 것이 필요한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상처들을 놓아버릴 수 있다."
p.12
"자기 자신을 희생자로 느끼는 것은, 자신은 책임에서 벗어나고 잘못을 항상 타인에게 전가한다는 뜻이다."
p.13
"영성의 길이 추구하는 근본 목적은 인간의 치유와 해방이다. 그리스도인은 외부에서 가한 고통에 좌우되지 않고 세상에도 좌우되지 않는, 오직 하느님에 의해 결정되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하느님에 의해 형성된 사람,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참으로 자유롭다. 이것이 성경의 근본 메시지이다."
p.21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우리 자신이나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데, 그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 는 자기처벌 또는 자기경멸로서, 심하면 자기 신체를 훼손하기도 한다. 많은 질병이 자기처벌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어렸을 때 거부당한 체험을 자기거부와 자기 증오로 변형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또 다른 방법은, 무의식적으로 유년 시절에 받은 상처가 되풀이되는 상황을 찾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종잡을 수 없이 성미가 급한 상사들을 찾는다. 그 상사들은 술을 많이 마시고 이유 없이 난폭하게 내리치면서 아무도 대항할 수 없게 했던 권위적인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다. 아니면 우리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통해서 받은 유년 시절의 상처를 반복하는 배우자를 찾는다."
p.22
"우리가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해칠 때에만 타인은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p.22
"인간은 내적으로 자유롭다. 인간이 타인에 의해 상처를 입게 된다면, 이것은 그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자신의 중심 안에 머물러 있으면, 아무도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고, 아무도 그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23
""인간들은 사건 때문에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대해 스스로 형성한 표상 때문에 혼란스럽게 된다"(에픽테토스)"
p.26
"인간이 서로 관계를 맺는 데에는 세 가지 덕이 필요하다. 깨끗함이나 순수함(katharotes), 신의 (pistis) 그리고 특히 부끄러움(aidos)이 그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각자는 먼저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발견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각자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이 세상의 연극에서 다른 역할을 수행하거나 인생이라는 배에서 다른 과제를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RAC 610). 각자는 유일한 존재이며, 자신의 고유한 지위(taxis)를 찾아야 한다. 그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연극에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역할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p.29
"우리가 우리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갈망 전체는,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로 향해야 한다. 그 일치는 본성에 해당된다. 본성에 따른 삶이 인간에게 어울리는 삶이다."
p.34
"우리는 결코 객관적으로 실재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항상 일정한 안경을 통해 실재를 본다. 종종 우리는 자신의 무의식적인 기대나 두려움을 사물에 투사한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투사 안경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을 바라본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그들에게 투사하고, 그들의 행동을 잘못 해석한다."
p.34
"내적 자아에 이르는 길은 초인격 심리학에서 비동일화의 길을 통과한다.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관찰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런 다음 생각에 깊이 잠기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분노를 받아들이지만, 내가 곧 내 분노는 아니다.‘ 내 안에는 분노가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이러한 내적 영역은 관찰되지 않는 관찰자, 감정을 알아차리지만 그 감정과 동일화되지 않고 그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내적 증인이다."
p.37
"우리는 내가 만든 표상에 상응하게 타인을 체험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닌 표상과 투사의 배후를 묻고, 사물과 사람을 하느님 빛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경우에만 우리는 그들을 온당하고 참으로 자유롭게 대할 수 있다."
p.40
"예수님이 인간과 문제를 구분하시는 것도 그분이 자유를 지니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완고함에 저항하시지만, 그들을 인간으로 받아주신다. 이것은 슬픔이라는 감정 안에서 표현된다. 그리스어 '슬픔‘(syllypoumenos)은 ’공감하다‘, ’동정하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반대하는 이들과의 연결을 끊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품으신다. 그들이 완고한 마음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래서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고 더 이상 그들 자신이 아닌 모습을 예수님은 슬퍼하신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주도권은 내적 자유이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다스리는 권한을 타인에게 주지 않으신다. 심지어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도 주지 않으신다(마르 3,6 참조)."
p.40
"예수님은 당신 자신과 바리사이들 사이의 경 계를 분명하게 긋고, 그들의 문제를 당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시기 때문에 자유롭게 행동하실 수 있다."
p.40
"예수님이 인간과 문제를 구분하시는 것도 그분이 자유를 지니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완고함에 저항하시지만, 그들을 인간으로 받아주신다. 이것은 슬픔이라는 감정 안에서 표현된다. 그리스어 '슬픔'(syllypomenos) 은 '공감하다, '동정하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반대하는 이들과의 연결을 끊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품으신다. 그들이 완고한 마음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래서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고 더 이상 그들 자신이 아닌 모습을 예수님은 슬퍼하신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주도권은 내적 자유이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다스리는 권한을 타인에게 주지 않으신다. 심지어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도 주지 않으신다(마르 3,6 참조)."
p.46
"예수님은 홀로 하느님과 머물러 있기 위해 사람들에게서 자유롭게 물러나기도 하셨다. 그분은 모든 사람의 간청을 충족해야 한다는 강요를 받아 들이지 않으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간청에 반응하셨던 장면에서 나타난다. 그 여인은 자신의 관심사를 위해 예수님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마 르 7,24 이하)."
p.46 ~ p.47
"우리의 사랑은 내적 자유에서 나오기보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고 어디에서나 인정을 받아야 한다 는 강박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강박은 간혹 두통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사랑이 내적 자유에서 흘러나온다면, 일반적으로 두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육체는, 우리가 정말 자유로운지 아니면 우리의 참여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말하자면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타인을 실망시키고 그들의 사랑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의해 이루어졌는지를 알려주는 정직한 지표이다."
p.47
"우리의 사랑이 자신의 필요와 타인의 기대에 따른 강박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이것 으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p.54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은, 끝없이 많은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강해진 상태로 그 고통에서 빠져나온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automatoi), 아무도 자기 자신을 반대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쇠약해지고 몰락한 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p.58 ~ p.59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의지하는 사람은 올바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사물에 관한 올바른 표상을 지님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상처 주는 일을 끝낸다. 신앙은 여기에서 일차적으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실재에 관한 올바른 표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앙은 건전한 삶의 기술로, 자기 자신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잘 대하는 기술로 묘사된다. 실재를 올바로 바라보는 사람, 사물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기에 다른 사물들도 그에게 더 이상 상처를 입힐 수 없다."
p.59
"크리소스토모는, 신앙을 오직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방식 곧 건전한 삶의 기술로 여기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에게서 앗아 갈 수 없는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p.59 ~ p.60
"크리소스토모 주교가 거론하는 성경의 인물들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삶의 근거와 발판으로 믿으면 믿을수록, 그만큼 우리는 타인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더 자유롭게 되고, 사물들을 더 자유롭게 대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소유하고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다."
p.85
"어떤 경우에는 이들이 스스로에게 계속 상처를 입혔다고 말할 수 없다. 외부에서 가해진 상처가 너무 잔혹하여 수십 년이 지나도 영혼에 새겨져 있을 때, 우리는 단지 하느님의 성령께서 그 상처를 치유해주시기를 희망하고 기도할 수 있을 뿐이다."
p.90
"어린 시절의 자기 상처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지 않을 경우 상처받는 그 상황에 반복적으로 빠져들게 된다. 마음이 기회를 얻기 위해서 같은 상황을 반복하여 찾는 것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더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자진 유급하여 한 학년을 다시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처음에 놓친 것을 배우기 위해 항상 다시 기회를 찾는다는 것이다."
p.92 ~ p.93
"욥은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았다는 사실 만큼은 확신한다. 물론 욥은 자기 자신을 탓하기도 하고, 자신의 태도에 의문도 품고,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아직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않는다. 이것은 독선이 아니라 정직이다. 그는 자신이 적어도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했음을 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결국 욥이 옳다고 선언하신다."
p.93
"욥이 불행을 겪은 이유는 그의 죄에 있지 않고,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자연의 기적 안에서 욥에게, 당신 자신이 욥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이러한 위대함 앞에 욥은 자신을 낮추고 이렇게 고백한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 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 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 42,5-6). 욥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고, 흙의 먼지로 빚어진, 하느님과 논쟁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라고 고백한다.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새로운 복을 베풀어주신다. 곧 재산을 갑절로 더해 주셨고,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주셨다. 이렇게 하느님에게 서 복을 받은 욥은 수를 다하고 죽었다."
p.99
"욥은 그 큰 고통 한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존엄성을 지켰고, 어쨌든 자신은 올바로 살았다는 사실을 믿었고, 고통은 자신이 불러들인 형벌이 아니라 하느님께 내맡겨야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운명임을 굳게 믿었다. 이런 태도를 취한다면, 슬픔의 긴 시간을 보낸 다음, 고통은 새 삶으로, 새로운 생동감과 자유로 변화될 수 있 다. 슬픔을 겪어낸 사람들은 보통 매우 성숙하고 침착한 사람들이다. 넓은 마음을 지니고 자기 삶에 대한 두려움에서 내적으로 자유롭게 된 사람들이다."
p.99
"욥은 그 큰 고통 한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존엄성을 지켰고, 어쨌든 자신은 올바로 살았다는 사실을 믿었고, 고통은 자신이 불러들인 형벌이 아니라 하느님께 내맡겨야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운명임을 굳게 믿었다. 이런 태도를 취한다면, 슬픔의 긴 시간을 보낸 다음, 고통은 새 삶으로, 새로운 생동감과 자유로 변화될 수 있 다. 슬픔을 겪어낸 사람들은 보통 매우 성숙하고 침착한 사람들이다. 넓은 마음을 지니고 자기 삶에 대한 두려움에서 내적으로 자유롭게 된 사람들이다."
p.114 ~ p.115
"내적 자아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 이 자아와 일치하여 사는 사람은 타인들이 적대시하고 비방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상처를 입지 않는다. 선한 양심 외에도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잠겨 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홀로 차지하시는 내적 공간이 있다. 이러한 내적 공간에는 외부에서 입히는 상처가 침입하지 못한다."
p.12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우리 곁에 계시다는 체험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각인된 무의식적 틀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해방하시어 실재에 이르게 하신다. 그분께서 우리 곁에 계시면, 우리는 실재를 공정하게 평가하고, 낡은 틀을 통해 실재를 어둡게 했던 일을 그만둘 것이다.“
p.126
"베드로의 첫째 서간이 말하듯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틀이 헛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뜻이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내가 그분에게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내 삶을 헛되고 병 들게 만드는 낡은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
p.150
"신중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은 의식적으로 산다. 그는 깊이 들여다본다. 세상의 근본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다른 가 능성, 참된 삶 곧 의식하고 깨어 있고 온전히 현존하는 삶의 기술을 깨닫는다. 의식적으로 사는 사람, 신적 실재와 대면하고 사는 사람은 사람들의 기대에서 자유롭다."
p.173
"하느님께서는 온전히 당신께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에게 새로운 존재, 새로운 태도를 일으키신다.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 안에서 보며, 온전히 하느님의 본성에 잠기게 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본성에 참여하고 있다."
p.178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다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에는 하느님의 본성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 어떤 부분을 나쁜 것으로 분리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성性이나 공격성 같은 것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과 세상, 인간의 본성과 하느님의 본성을 완전히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지나치게 엄격한 금욕주의로 자주 자기 자신에 맞서 분노했고,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p.187
"상처와 화해하고, 상처가 우리를 평생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때서야 우리는 상처를 창조적으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상처를 받아들이면, 상처는 더 이상 우리를 위축시키지 않는다. 상처를 입었다고 더 이상 한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도움이 필요해서 우리를 부를 때 우리의 상처 는 우리를 막아서지 않게 될 것이다. 상처는 우리로 하여금 주변 사람들에게 민감해지게 한다. 우리가 메시아처럼 우리의 상처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대하면, 우리도 이웃의 상처를 싸매고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