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뿐인 마음 2024. 11. 2. 16:13

김소윤 장편소설. 은행나무.

그동안 꼭 한번 봉헌된 정난주 성당을 보고 싶었는데 이번 성지순례 때 다녀왔다. 그곳 신부님으로부터 이 책을 받았고, 가슴에 품은 채 대정성지를 방문해 그 묘 앞에서 기도를 바쳤다.

다리를 또 다쳤다. 무척 좋았던 성지순례지만, 밤 열시가 넘어 도착해서 고단한 몸으로 잠마저 부족한 채로 새벽미사를 나가다가 계단을 헛디뎠다. 아찔한 두려움은 잠시, 아, 통증이 예사롭지 않았다. 도대체 몇 번째 골절인지. 며칠 동안 도저히 끝이 안 난다는 생각에 머리도 마음도 너무 복잡했다.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책을 집었지만 집중이 잘 안돼서 짧게 끊어가며 정난주 마리아의 삶을 따라갔다. 읽을 때보다 사이사이 여운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남은 시간을 채웠다. 정난주를 끝까지 살게 한 그 힘을 나도 붙들고 싶었다.

정난주 마리아의 삶은 내 것과 견줄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지만, "하늘이 멀다 하나 어디서나 흰빛은 내리고 그 땅이 멀다 하나 마음까지 멀겠느냐. 너는 어디서나 반듯하게 이름을 지키고 몸을 세우며 함부로 울지도 엎드리지도 말라."는 목소리는 이미 내 귀에 맴돌았다. 어떤 힘이 나를 반듯하게 지키는지, 어떤 힘이 나를 곧게 세우는지, 어떤 힘이 내 눈물을 닦는지, 어떤 힘이 내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는지… 그게 천주이신지, 천주의 마음을 닮은 누군가인지, 천주께서 보살펴주신 내 삶인지 곰곰이 짚어보며 나도 매일을 살아내야겠다.


p.50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종국에는 흘러간다. 그늘도 음지도 해가 들면 다시 꽃을 피운다. 지금 우리가 이러하다고 본래 이렇고 훗날 이렇겠느냐. 어미와 떨어지거든 하늘이 찢어지도록 울어라. 울어서 네가 살아 있음을 알려야 한다. 그래야만 네가 산다. 그 울음을 주께서 들을 것이고 사람의 귀가 들을 것이고 종국에는 인정이 움직일 것이다. 어미는 잊기도 잊으려니와 그리워도 말거라. 사무치는 그리움은 너를 상하게 하니 차라리 그리움을 모르는 것이 나으리라. 극통한 아픔은 이 어미의 가슴 에 묻고 피눈물도 어미가 흘릴 것이다. 너는 그저 울고 떼쓰며 입고 먹으며 숱한 세월을 한날같이 아이로 자라거라."

p.72
"어두운 산을 걷다가 등불을 만나면 어떠하겠느냐?"
"반갑겠지요"
"등불이 어둠을 밝혀주면 어떻겠느냐?"
"산을 넘기가 쉽습니다."
"산을 넘으면 무엇이 나오겠느냐?"
"사람이 사는 마을이 나오겠지요."
"그 마을이 바로 천당이다."

p.126
"하늘이 멀다 하나 어디서나 흰빛은 내리고 그 땅이 멀다 하나 마음까지 멀겠느냐. 너는 어디서나 반듯하게 이름을 지키고 몸을 세우며 함부로 울지도 엎드리지도 말라."

p.226
"말로써 믿음과 배신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인지 난주는 알 수 없었다. 조선의 많은 천주교인들이 잠시라도 천주를 부정할까 두려워하였으나, 난주는 천주께서 과연 외식된 말과 진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실는지 궁금했다."

p.326
"두려울 게 뭐요? 우리가 아무리 못났다고 해도 하늘에서 보기에는 그저 아름다울 것이오. 자신의 이름조차 모를 이 바윗덩이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저 하늘의 바람이나, 설사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게 된 바보라도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