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食性 人間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하나 뿐인 마음 2024. 10. 22. 11:26

 
백수린 에세이. 창비.
 

작가의 마음 속으로 산책을 다녀온 기분이 드는 책이었다.
가녀리고 서툴고 순하고 선한 사람들이 제 보폭으로 세상을 걸어나가길
기도하는 심정으로 읽었달까.
 
하루종일 cpe 교육이 있는 날은
그렇게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인데도 마음 한켠은 늘 버거웠다.
아침에 좀 더 쉬고 나올 수 있는데도 굳이 서둘러 가방을 싸들고 나와
명동성당 근처 벤치나 카페에서 이 책을 홀로 읽으며
나도 성곽길 어딘가를 걷는 마음으로
오롯한 시간을 보냈다.
이 책 덕에 그렇게 나를 채운 후 강의실로 들어갈 수 있었고
하루 종일 이어지는 그 시간을 미안함 없이 버틸 수 있었다.
그동안 고마웠었다.
 
리뷰는 아니지만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이해하지 못하던 아빠의 표정을 보며
남성이 보는 세상과 여성이 보는 세상이 다른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던 작가의 글을 읽었을 때
나 역시 종종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모두가 볼 수 있는 댓글로
어느 성당에 있냐, 일하는 곳이 어디냐, 어디 수도회 누구냐 묻거나
올린 사진을 보며 근처에서 일하냐, 그 동네에 사느냐 물어오면
정중히 거절하거나 답을 달지 않기는 하는데
그것 자체가 누군가를 특정하고 숙소까지 드러내는 질문이라는 걸,
그것이 누군가를 곤란하게 혹은 위험하게도 할 수 있는 질문이라는 걸
위험했던 경험이 없는 누군가는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 종종 두렵다.
블로그 댓글창을 닫고 sns 디엠을 닫은 이유 중 하나이고 어쩌면 가장 큰 이유다.
그래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계속 하면서 살테지만,
나를 지키고 보호할 줄 알 때 나의 행복도 지켜지고 보호될 것이므로...
이제는 정중하게 거절할 줄도 알고,
거절의 말에도 계속 보채는 사람에게는 외면할 줄도 알게 되었지만,
여러분, 질문은 상대를 고려하여 합시다!


p. 59
"어째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죄다 하찮고 세상의 눈으로 보면 쓸모없는 것들뿐인 걸까. 하지만 이제 나는 쓸모없는 것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촘촘한 결로 세분되는 행복의 감각들을 기억하며 살고 싶다. 결국은 그런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할 것이므로."

p.131 ~ p.132
"상대의 슬픔에 공감하는 일에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는 기쁨과 달리 슬픔은 개별적이고 섬세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겪어낼 수밖에 없는데, 그건 슬픔에 잠긴 사람의 마음이란 살짝 스치기만 해도 쉽게 긁히는 얇은 동판을 닮아서다. 슬픔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감정과 타인의 감정이 끝내 포개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없이 예민해지고, 슬픔이 단 한 사람씩만 통과할 수 있는 좁고 긴 터널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슬픔에서 빠져나온 이후엔 그 사실을 잊은 채 자신이 겪은 슬픔의 경험을 참조하여 타인의 슬픔을 재단하고, 슬픔 간의 경중을 따지며,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와 크기로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고 쉽게 말한다."

p.166 ~ p.167
"한밤중에 동네를 다시 한번 찾아가본 후 계약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는 말을 했을 때, 아빠는 나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셨다. 한밤중에 누군가가 쫓아오는데 달아나거나 숨을 곳이 없으면 어떻게 하냐고 내가 묻자 그제야 아빠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쓸 생각조차 못했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남성이 보는 세상과 여성이 보는 세상이 이토록 다르다는 사실을 그 순간 절실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