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食性 人間

새벽에 생각하다

하나 뿐인 마음 2024. 8. 28. 11:50

 

천양희 시집. 문학과지성사.

 

지난 일기장을 펼치듯 시집을 펼쳤다. 언제 다시 펼쳐도 이 시를, 이 시인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달까.

 


p.21
바람결에 잎새들이 물결 일으킬 때
바닥이 안 보이는 곳에서 신비의 깊이를 느꼈을 때
혼자 식물처럼 잃어버린 것과 함께 있을 때
사는 것에 길들여지지 않을 때
욕심을 적게 해서 마음을 기를 때
슬픔을 침묵으로 표현할 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으므로 자유로울 때
어려운 문제의 답이 눈에 들어올 때
무언가 잊음으로써 단념이 완성될 때
벽보다 문이 좋아질 때
평범한 일상 속에 진실이 있을 때
하늘이 멀리 있다고 잊지 않을 때
책을 펼쳐서 얼굴을 덮고 누울 때
나는 기쁘고

막차 기다리듯 시 한 편 기다릴 때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쓰는 일일 때
나는 기쁘다

- 나는 기쁘다 -

p.45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러면 어때 저러면 어때

기쁨으로 술렁대고
슬픔으로 수런거릴 때
푸른 나무와 향기로운 풀이
꽃 피는 시절보다 나으면 또 어때

‘바람의 이름으로’ 중에서

p.48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집에 앉아서 집에 가고 싶다는 혼잣말을 할 때가 있다
내가 나를 놓칠 때가 있다
시 씁네, 하고 스스로 고립될 때가 있다
마음 놓고 사무칠 수도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가 있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