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
허현숙. 서정시학.
처음부터 진한 물감으로 채우듯 바르는 유화가 아니라
진한 물감으로 슬쩍 그린 선이 물을 만나 서서히 번지고 번져 도화지를 점점 물들이는 수채화 같은 시들.
우주를 뒤흔든 싸움 끝에
지옥에 나뒹구는 사탄의 신세로
아직도 부연 연기가 모락모락 하늘거리는
들판 한구석에 쓰러져
꿈속인 듯 가물거리는 바람과 모래더미 속
피투성이 어지러운 수풀
그 틈에 끼어서 여전히 일어서는 네 하얀 몸
어느 사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허름한 집구석 비집고 들어와
한 살림 단단하게 차리고 있어
아니 벌써 둥지 틀어 틈만 나면 칼을 갈며
내 가슴속인지 뱃속인지
사방 휘저어 다녀 피눈물로 흔적을 남기든지 어디라 정한 곳 없이 노닐고 있든지 단 한 푼도 내지 않고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밥까지 지어 먹으며 둥지를 틀었다
가끔은 너도
시끄러운 시동 소리 내며
멀리 소풍을 나가는 것도 같다만
어김없이 자기 안방인 양
내 머릿속으로 밀쳐 들어와서
가볍게 코를 골며 잠을 자기도 하고
깨어나선 물 달라고 소리 지르다
나 죽으면 너는 어디에서
네 한 몸 의지할까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 흔들거릴
의자나마 어디에서 찾을 텐가
- 집착 -
너를 내 방으로 데려온 날
어제인 듯 나 기억하네 방안 가득
햇살 눈부셔 잠시 어찔했던 그날을
틈만 나면 들추는 내 손길에
너는 지금 너덜너덜한 몸으로
나를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너의 검은 눈동자
그 속 알갱이 하나하나 모두
나에게 내주지만 처음의 너는
빳빳한 몸을 곤두세워 마치 막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파다닥거리며 내 손가락
서툰 몸짓에 여지없이 상처를 내어 가끔은
손금 따라 내 가슴속까지
가느다란 피의 강물
간혹 너를 안아들고 살금살금 쓰다듬으며
사랑한다는 말 눈으로만 너에게 전하는데
나와 함께 늙어가며 군데군데 부실해지는 너의 몸은
여전히 내 손길에 뜨거워지는구나 그럼에도
나 가끔은 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휘황찬란한 옷차림 가벼운 손짓들로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지만
그것도 잠깐
너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어떡하면 좋으냐
이미 오래된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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