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

RB 제4장 착한 일의 도구들은 무엇인가

하나 뿐인 마음 2020. 6. 6. 22:45

수도생활을 함에 있어 고쳐야 할 것이나 만들어야 할 것들이 있으면 작업에 필요하고 딱 알맞은 도구들을 꺼내 쓸 수 있도록, 베네딕도 성인은 착한 일의 도구 74개를 규칙서에 넣었다. 자급자족이 기본이고 기도하고 일하던 수도자들에게 '도구'라는 이미지가 얼마나 와닿는 의미였을지 짐작이 간다. 이 도구상자는,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어려운 길보다 더 나은 길이 있음을 알려주고, 이미 살고 있는 이들에게도 덜 수고롭게 '고치도록' 도와준다. 하나하나 묵상한 후 이들 중 내가 주로 꺼내 써야할 도구들에 대해서만 간단히 적어보고자 한다.

 

1 첫째로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 

2 그 다음으로 이웃을 자기와 같이 사랑하라.

당연히 첫자리에 두어야 할 이 성경 말씀을 굳이 두 절로 나누어 놓은 것은 둘을 분명 다르기 때문일 것이요, 하나를 한다고 해서 다른 하나가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말로는 하느님을 사랑을 첫자리에 둔다고 하지만 정작 일상에서 내가 기울이는 노력의 크기를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이웃 사랑도 중요하지만 챙겨주고 기도해주고 격려해주고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모든 노력을 하느님께도 분명 해야 한다. 가만히 앉아 말만 한다고 이웃 사랑이 아니듯. 

 

10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을 끊어 버려라.

수행마저도 그저 좋은 사람, 스스로 만족스러운 성품의 인간이 되려고 한 적이 많았음을 반성한다. 그리스도 추종(Sequela Christi)이 수도생활의 분명하고도 유일한 목표이며, 끊임없이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를 향해 매일매일 나아가야 하는데 겨우 이웃사랑 정도에서 번번이 그치고 만다. 나를 끊어버리는 것. 죄, 악의 유혹, 마귀에서 더 나아가 나 자신마저도 끊어버리는 것이 나의 삶.

 

11 육체를 다스리라.

물론 극기도 포함하는 내용이지만, 기도할 수 있도록 몰입을 방해하는 것들을 털어내거나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요즘은 내 천성으로 버틸 수 있는 기도의 시간은 거의 끝이 났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타고난 성격 덕에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고, 무언가를 듣거나 읽고 깊이 생각하고 그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을 좋아했기에 렉시오 디비나나 영적 독서를 좋아하고 즐겨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바르지 않은 자세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아졌고 온 힘을 다해 바르게 앉아야만 기도 자세를 유지할 수 있고, 그 기도 시간에 나를 온전히 바칠 수 있다. 내 몸마저도 내뜻대로 하지 않아야 비로소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피정 동안, 초반에 너무 좋아서 편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다고 고질병인 좌골신경통으로 고생을 했다. 공동 렉시오 디비나 때도 서서 기도하고 반추 기도도 서 있었다. 비는 시간마다 운동과 바른 자세로 앉는 연습을 해서 겨우 다시 기도 자세를 잡을 수 있었다. 부디 육체를 다스려라.

 

20 세속의 행위들을 멀리하라.

덧없는 즐거움만이 전부인 행위를 멀리하라. 하느님께 가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것. 기도할 수 없다면, 그건 내 삶에서만큼은 없어도 될 것들.

 

21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

이 말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또한 얼마나 요원한가.

 

22 화내지 말라.

23 원한을 오래 품어두지 말라.

수도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자주 이 도구들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베네딕도 성인은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도구들을 사용하여 반드시 고치고 해결해야 하는지도 아셨을 것이다. 에바그리우스는 분노와 원한은 순수한 기도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라 했다. 마음을 딱딱하게 굳어버리게 하고 차갑게 식어버려서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분노와 원한. 사사로운 일에도 이 감정을 품기 시작하면 좀처럼 돌아설 줄 모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할 것. 

 

24 간사스런 계교를 마음에 품지 말라.

이럴 수도 있을까 싶지만, 세상에 있어선 안 될 일들은 많아도 세상에 없는 일은 없더라. 아무도 모른다 싶은 마음 저 한구석까지도 악에게 자리를 내주지 말 것.

 

26 사랑을 버리지 마라. Never turn away when someone needs your love. 

수도삶에서도 누군가가 나의 사랑을 요구한다는 것을,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갈 길을 가거나 눈을 감아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성인. 내 뜻대로만 살다보면 내 사랑이 마치 내 것인 양 피곤하다고, 바쁘다고 핑계를 댄다. 자꾸 도와주면 버릇이 될지도 모르고, 의존하는 습관이 강화된다며 멋대로 판단하고 내 행위를 정당화 한다. 상대를 향한 사랑을 버릴 때 내 안의 사랑이 버려지는 것인 줄 알면서도 어리석게 반복하는 것이 인간이고, 나 자신이다. 가만히 둘러보면 그간 내가 버린 사랑이 저만치서 한겨울 낙엽처럼 굴러다니는구나. 

 

29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30 불의를 행하지 말고, 자기가 당한 불의도 인내로이 참아라.

31 원수를 사랑하라.

32 악담을 악담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라.

당장의 상처에 몰입하여 자신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아가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이 도구들은 필요하다. 내가 내 마음을 진창으로 만들지 않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가. 스스로 후회할 일들을 과감히 하지 않는 것은 그 누구보다 나를 위해서 실천해야 하는 일들이다. 우리가 관계 맺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상처과 멸시, 모욕, 불의 등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하고 처리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영적 진보가 달라진다. 내가 받은 상처에 사로잡혀 남은 시간을 보낼 수도 없거니와 나의 날개를 꺾으려는 이들의 영향력 안에 머물지 않는 노력은 너무도 필요하고 중요하기에 성인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이 도구들을 말한다. 분노와 원한은 순수한 기도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라고 했던 에바그리우스의 말도 다시 한 번 새기자.

 

39 불평쟁이가 되지 말라

40 험담꾼이 되지 말라.

나는 어려운 일이나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부탁을 받으면 불평하고 투덜대면서도 하고 마는 성격이다. 냉정하다는 판단을 감수하고라도 딱 끊어내거나 묵묵히 잘 받아 안고 싫은 내색 없이 돕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하는데, 이도저도 아니니 하고 나서 마음이 불편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내적 자세'를 언제나 중요하게 여겨 불평을 공동체는 물론이고 수도생활의 해악으로 여겼는데, 나는 여기에서 참 많이도 걸려 넘어진다. 고해성사를 준비할 때 제일 많이 걸려 넘어지는 부분도 바로 '불평'이다. 이것이 지나치면 억울함을 하소연 하다가도 험담으로 넘어가기 쉽고, 억울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이어지는 죄를 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언제나 '41 자신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는 도구를 수시로 꺼내어 사용해야 할 것이다. 

 

48 자신의 일상 행위를 매순간 조심하라.

49 어느 곳에서나 하느님께서 자신을 지켜보고 계심을 확실히 알고 있어라.

인간은 자칫하면 어리석기 쉬운 존재라 한 순간도 하느님 앞에서 숨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수시로 하느님을 잊거나 없는 것처럼 살기도 한다. 수도자라고 예외일까. 끊임없이 하느님의 현존을 기억하는 것, 즉 어느 곳에서나 하느님께서 자신을 지켜보고 계심을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56 기도에 자주 열중하라.

내 존재의 이유인 것처럼 자주, 열중해서 기도할 것. 적어도 진짜로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를 실수하지 않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재촉한다. 피정에 들어와 매일 개인으로 묵주기도 20단 이상씩을 바치도록 마음을 먹고 실천 중이다. 기도에 자주 열중하는 자세가 내게 무엇을 주는지, 내 앞으로 어떤 세상을 펼치는지 온 몸으로 체험 중이다. 

 

61 모든 일에 있어 아빠스의 명령에 순종할 것이며, 이런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비록 아빠스 자신이 다르게 행동할지라도 "그들이 말하는 것을 실행하되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말라"하신 주님의 명령을 기억하여 그렇게 하라.

자신도 아빠스이면서 이런 도구를 규칙서에 남긴 베네딕도 성인은 얼마나 겸손한가. 그는 인간의 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65 아무도 미워하지 말라.

이 도구를 꺼내드는 심정... 어떤 방법으로 미워하지 않을지를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아무도 미워하지 말라'라고 말하는 성인. 어떤 감정이나 행위들은 '그저 하지 않음'이 필요하다. 

 

74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절대로 실망하지 말라.

살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 돌아보면 은총 아닌 것이 없더라. 내 삶에서도 하느님은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시지 않으셨기에, 나는 오늘도 내일도 하느님의 자비에 실망하지 않는다. 보잘 것 없는 나도 이럴진대, 베네딕도 성인의 이 말씀은 얼마나 단단한 확신이겠는가. 

 

76 우리가 이것들을 밤낮으로 끊임없이 채워 실천하고 심판의 날에 그것을 돌려드리면, 주께서 친히 약속하신 그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니

이 도구들조차 내 능력으로 거둔 것이 아님을, 내것이 아니기에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은, 돌려드림으로 받게 되는 상급일 것이다. 내가 택한 도구라면, 내가 만든 도구라면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의 것을 내가 빌려 썼으니, 이는 내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