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침묵은 잘못된 정치에 동조하는 것-교회의 정치 참여에 대하여-마지막회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종교가 없으신데, 지금 왜 모든 종교들이 시국선언을 하고 있는지, 무신론자들도 알아듣게 설명해 달래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민주주의는 삼권 분립이 원칙이죠.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이 세 부서가 고유하게 독립성을 갖고 활동해야 민주국가죠. 입법부는 법 만드는 국회고, 사법부는 법 집행하는 곳, 법원과 검찰이죠, 행정부는 그 법의 토대 위에서 국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하는 정부구요. 이 세 기관은 서로 독립성을 유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건강한 견제를 해야 하지요. 그런데 입법부 즉 국회의 다수당과 행정부를 관장하는 당이 같아요. 그러면 ‘국민들이 그렇게 뽑았으니까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고 물으시겠죠.
좋습니다. 그러면 사법부는 어떤가요? 지난번에 국가 기관의 선거 개입 사건을 검찰총장이 제대로 조사하려고 했더니 아주 커다란 신문사에서 저 사람이 혼외 자식이 있다며 확인 되지도 않은 의혹을 제기했고, 결국 검찰총장이 옷을 벗었어요. 그런데 이 정보를 신문사에 제공한 사람이 청와대 소속이었다는 거죠. 이번에는 팀장이 제대로 수사하려 했는데 정직 처분을 받았어요. 사법부가 독립적으로 일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삼권 분립이 잘 안된 거죠.
그러면 제4의 권력이라는 언론이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대형 신문사와 방송국은 정부 편에서 보도를 해요. 사실은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데...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보고 있는 신문과 방송이 가장 중립적이라고 생각을 하지요. 스스로 비판적으로 보고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특정한 신문이나 방송이 자기의 논조와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하고 선호하지만, 그건 그 신문과 방송이 직간접적인 노력을 통해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결과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매체를 비교해 가면서 읽고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바라보신 것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입장을 존중하며 세상을 바라보고 보도하는 매체인지, 정반대로 헤로데와 빌라도의 편에서 바라보도록 부추기는 매체인지를 복음적 시각으로 분별할 필요가 있지요.
많은 대형 매체들은 실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힘 있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고, 언론사 사주의 이해득실과 관련하여 특정한 쪽의 입장만을 중점적으로, 때론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보도하고 있는데,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보도 내용을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정치가 종교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말도 어느 신문에서 읽으신 글귀일 거예요. 하느님 말씀보다 더 깊이 뿌리 박혀 있는 내 신념이 신문에서 읽은 글귀라는 것조차 모르도록 우리 안에 배어 있다는 것이야말로 깜짝 놀라야할 일입니다.
ⓒ한상봉 기자 |
최근에는 특정한 기업이나 사주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국민들이 참여해서 만든 건전한 매체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국민들 스스로 SNS 등을 통해 객관적이고 바른 정보를 많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여론 형성에서 긍정적인 측면들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훼방하고 왜곡하여 여론을 조작한 것이 바로 국가 기관들의 불법 선거 개입 사건인 거죠. 말하자면, 국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인 국민 투표권이 공정하고 객관적인 여론을 접할 권리를 상실한 채 심각하게 훼손된 것입니다.
자, 사법부와 언론이 그렇게 되어 있으면, 이제 우리나라에 남은 기관이 뭐가 있어요? 종교와 시민단체들 뿐이지요. 그런데 요즘 처음 듣는 이름의 시민단체들이 마구 생겨나면서, 어떤 단체가 정말로 중립적인 위치에서 행정부를 감시하는 단체인지 혼란스러워지고 있어요.
그러면 남은 건 뭐죠? 종교 밖에 없지요. 종교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잘잘못을 가리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인 거죠. 종교마저 정부 편을 들거나, 아무 얘기 안하고 있으면 우리나라에는 정부가 하는 일을 제대로 견제할 기관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많은 국민들이 종교계에 그걸 바라고 있어요. “정치가 잘못할 때, 종교는 침묵함으로써 잘못된 정치에 가장 잘 협력한다”는 격언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황님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예언직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종교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사회 문제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말씀 붙이자면, 요즘 어떤 분들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마태 22,21)라는 구절을 들어 정치와 종교의 영역이 구분된다는 성경의 근거로 제시하는데, 이는 이 말씀에 대해 몇 십 년 전에 어느 정치인이 했던 다분히 ‘정치적인’ 해석을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교와 정치를 구분하라 하시면서 왜 하느님 말씀마저 정치인들이 해석해 주는 대로 믿으시는지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바리사이와 헤로데 당원들이 작당하여 예수님을 찾아와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을 하는데요, 이는 둘 중 어느 쪽으로 대답하든 봉변을 당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인 질문입니다. 식민 지배국에게 세금을 내라고 하면 유대 민족주의자들인 열혈당원들에게 봉변을 당할 것이고, 내지 말라고 하면 친로마 유대인들에 의해 고소를 당할 처지인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계략을 알아차리시고 그들이 상상조차 못했던 대답을 하신 것이지요.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마태 22,19-20) 로마제국이 발행한 데나리온 동전에는 카이사르의 흉상이 그려져 있었고, 뒷면에는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신(神)인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에 대한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황제를 신 또는 신의 아들이라 부르게 했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유대인들에게는 이 화폐의 유통 자체가 우상숭배적인 요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점을 은유적으로 그러나 날카롭게 지적하시며,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주고’ 즉, ‘우상숭배일 뿐인 그 동전은 모상의 주인인 카이사르에게나 돌려주고’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카이사르의 것에 카이사르의 모상이 새겨져 있다면, 하느님의 것에는 하느님의 모상이 새겨져 있겠지요. 하느님의 모상은 바로 인간입니다(창세 1,26).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것이고, 실은 카이사르마저 하느님의 것입니다. 답변을 듣고 돌아가던 이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되 뇌이다 무릎을 쳤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지혜로운 답은 없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라는 말씀은 정치와 종교가 상호 불가침의 영역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상숭배에 불과한 돈을 놓고 고민하지 말고, 모든 것이 - 심지어 황제와 그가 행하고 있는 정치마저 - 하느님의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김유정 신부 (대전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