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은 정말 있는 것일까?
16세기 개신교 종교 개혁가들은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하다는 이유로 연옥교리를 거부하였지만 연옥교리는 교회의 역사와 전통에서 나온 것입니다. 258년에 순교한 카르타고의 주교 성 치프리아노는 치열한 박해시대를 살았습니다. 그 와중에 배교했다가 회개하고 교회 안에서 보속하며 생활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치프리아노는 사목자로서 배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보속생활을 시작하였다가 죽으면 후세에서도 보속을 계속하여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시작된 보속을 교회와 함께 사후에도 계속할 수 있고 정화를 완성시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연옥교리의 근본은 성인들의 통공교리입니다. 더 근원적으로 올라간다면 그리스도의 몸 개념입니다. 연옥교리의 근거는 정화의 필요성인데, 이는 성경적 사상입니다. 로마의 지하묘지에서 발견된 비석들을 보면 초대교회가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를 바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3세기 초 테르툴리아노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를 언급하고 그들을 위한 성찬예식을 증언합니다. 4세기 성 아우구스티노의 증언에 따르면, 초대교회부터 이미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죽은 이들이 교회와 함께 지상에서 정화를 시작하였다면 정화의 완성이 필요한데, 교회가 죽은 이들과 한 몸으로써 대신 정화시킬 수 있으며, 죽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떨어져나간 이들이 결코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천국과 연옥과 지옥을 장소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죽은 이들의 영혼은 시공에 구애를 받지 않는데, 그런 영혼이 천국이나 연옥 혹은 지옥 같은 장소에 있다는 것은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연옥은 라틴어 ‘푸르가토리움'(Purgatorium)의 번역입니다. 푸르가토리움은 원래 장소를 뜻하지 않고 ‘정화시켜주는'이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그런 연옥을 장소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유다교에서 이어받은 쉐올(죽은 자들이 모여 있다고 생각한 지하세계) 사상이 제대로 승화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세 때 베네딕토 12세 교황은 ‘성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고 선언함으로써 연옥은 장소라기보다는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를 뜻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교회는 천국에 가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그들이 천국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지옥에 가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습니다. 한번 가면 나올 수 없는 곳이 지옥인데, 우리가 기도한다고 거기서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연옥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살아 있을 때 시작한 정화를 교회와 함께 계속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연옥에 대한 가르침은 구약의 마카베오기 하권(2마카 12,39-45)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만일 ‘천국’과 ‘지옥’ 밖에 없었다면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해 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지요. 가톨릭교회는 의로움이 부족한 사람들이 죽어서 천국에 가기 전에 거치는 정화의 단계를 연옥이라고 보았습니다. 베드로 1서의 말씀도 ‘연옥’을 시사하지요. “그리하여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시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1베드로 3,19) 분명한 것은 여기서 ‘갇혀 있는 영혼들’이 지옥의 처지에 있는 것도 천국의 처지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으려면 죽은 다음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030항).
넓게 봤을 때 연옥은 천국의 일부이며, 지옥과 천국이 영원한 것에 비해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기도 하지요.
만일 사람이 죽어서 천국 아니면 지옥을 간다면 불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어서 곧바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순교자 말고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곧바로 천국으로 못 가는 사람이 모두 지옥으로 가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연옥교리는 참으로 고마운 교리입니다. 살아서 다 못한 보속이 있다면 죽어서도 성인들의 통공 덕분에 교회와 함께 정화의 과정을 거쳐 천국으로 갈 수 있으니 평범한 우리로서는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지요!
사진은 우리 수녀원에서 장례가 나면 우리들이 수도복에 애도의 표시로 다는 리본입니다. 수녀님 한 분이 돌아가시면 우리 수도가족은 모두 상주가 됩니다. 헤어짐은 슬프지만, 돌아가신 수녀님이 이제는 세상을 위해 하느님 곁에서 영원히 기도해주시는 전구자가 되셨음을 믿고 기도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