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부르심따라

생명이신 당신 덕입니다

하나 뿐인 마음 2013. 7. 12. 13:58



쇄신회를 준비하는 지금, 근래 내 삶의 화두가 무엇이었나 돌아보니

과히, '생명'이었구나 싶습니다.


무엇보다 살고 싶었습니다. 

부끄럽지만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살고 싶었습니다.

죽어야 산다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는다는 예수님 말씀이 

야속하고 또 야속했지만

내가 살고 싶어서 내가 죽어야겠노라 겨우 다짐했던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 오셨다고 하니

그거 하나 믿고, 아니 예수님 한 분 믿고 죽어보겠노라 했던 겁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예수님이 죽고 내가 살았던 겁니다. 

난 내가 살고 싶어서 내가 죽겠노라 다짐했는데

죽음의 대상과 삶의 대상이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이제야 뒤늦게 알아챈 겁니다.

내가 씨앗이면 열매도 당연히 '나'이거니 여기고 죽을 결심을 했던 거지요.

예수님은 죽어서 나를 살리셨는데

나는 죽어서까지도 나를 살리려고 했음을 알아차린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내 자신의 어리석음이 두려워지더군요.

밤길에 만나는 타인의 존재보다 어둠에 빠져있는 내 자신이 더 무서운 존재라는 걸 인정해야겠습니다.


뒤따라 오는 깨침 역시 가히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나의 '삶'이 타인의 '죽음'이었음을 인정해야 하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셨다는 건 눈물나도록 고마우면서(그래서 검은옷의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타인이 날 위해 죽었다는 건 

내 형제가, 어쩌면 내가 그토록 꺼려하던 형제가 날 위해 죽었을 수도 있다는 건

어이 이리 부정하고만 싶은 건지요. 

내가 영글어가는 열매가 되어가던 때에 썩어버린 씨앗을 자처한 형제가 분명히 있었음을

저는 어찌 이토록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요.

몰랐던 사실도 아니니, 잊고 있었다라기 보다는

잊고 싶었다라고 고백해야겠지요.

사실 어디 잊고 싶기만 했었던가요, 그보다 더한 마음도 품은 적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의 나무일 때도 있지만 '우리'가 하나의 나무일 때도 있는 법이지요.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더 많은 나무를 그려야 한다고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더 큰 그림을 위해 더 큰 나무를 그려야 하는 때도 있는 법인가 봅니다. 


무엇보다 지금이 나무를 더 크게 그려야 하는 때인가 봅니다.


생명이신 당신 덕입니다.